취재 | ‘주 최대 69시간’ 근로시간 개편안 살펴보기

“적게 일하고 많이 버세요.” 한때 유행했던 이 덕담은 한국의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을까. 지난 6일(월) 정부는 근로시간을 일주일에 최대 69시간까지 늘릴 수 있는 ‘근로시간 제도 개편 방안’을 발표했다. 개편안은 △선택권 △건강권 △휴식권 △유연한 근무방식 확산을 지향점으로 내세웠지만,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다. 『대학신문』은 개편안의 내용에 대한 현장 노동자의 목소리를 듣고 쟁점을 짚어봤다.

 

누구의 선택권인가, 누구를 위한 유연함인가

정부는 해당 개편안을 발표하며 유연한 근무 방식의 확산을 강조했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현재는 한 주에 법정 근로시간 40시간과 연장근로시간 12시간을 합쳐 총 52시간까지만 일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개편안은 이렇게 규칙적으로 운영되던 주 단위의 근로시간을 선택적으로 운영하도록 규정한다. 일주일에 12시간 이상 연장근로를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11시간 연속휴식권만 보장된다면 일주일에 최대 69시간까지 근무할 수 있고, 보장되지 않을 시에는 최대 64시간을 근무할 수 있는 구조다. 정부는 ‘일할 때 집중적으로 일하고, 쉴 때 길게 쉬는 문화’를 유도하는 효과를 기대했다.

하지만 근무 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유연화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정부는 노사 간의 협의를 통해 연장근로시간을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노동자의 ‘시간 주권’을 확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노사가 대등한 위치에서 근로시간을 협상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구조 아래, 결국 확대되는 것은 사용자의 선택권뿐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민간 공익단체 ‘직장갑질119’ 신지영 활동가는 “개편안이 강조하는 것은 노사 간의 자율과 선택권인데 대부분의 현장에서는 노사가 동등한 위치에 놓이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한상진 대변인도 “노동자는 자신의 근로시간을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없고, 사용자는 손쉽게 연장근로를 지시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IT업계 중소기업에서 근무하는 A씨(회사원·27)는 “중소기업의 노사협의회는 사용자와 적극적으로 교섭하기 어려워 사측에서 시키는 대로 일할 수밖에 없다”라고 답했다. 무노조 노동자나 비정규직 노동자, 혹은 인력이 부족한 소규모 사업장의 노동자는 연장근로에 내몰릴 확률이 더욱 높다.

실제 현장에서는 몰아서 일하는 것이 효율적인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IT업계에서 근무하는 B씨(회사원·51)는 “대형 프로젝트는 2~3개월간 장기적으로 진행되기에, 프로젝트가 있는 시기 내내 장시간 노동과 야근이 일상화될 것이라고 예상한다”라며 “차라리 매주 규칙적으로 52시간을 일하는 것이 일의 효율성 측면에서는 더 나을 것”이라고 답했다. 또한 자동차 부품업계에 종사하는 C씨(생산직·46)는 “공장에는 라인의 속도가 정해져 있어 주 69시간까지 몰아서 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라고 답했고, D씨(사회복지사·26) 역시 “사회복지 현장은 긴급 상황이나 돌발 업무가 많아 사전에 근로시간을 협의해 탄력적으로 일하는 것이 효율적일지 의문이다”라고 전했다. 이처럼 개편안을 통해 업무 방식에 따라 효율을 추구하겠다는 정부의 주장과 달리 현장에서의 실효성은 제대로 검토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일 앞에 주객전도된 생존, 휴식권과 건강권

휴식권과 건강권 보장 또한 이번 개편안의 주요 취지였다. 정부는 휴식권 보장을 위해 저축해 놓은 연장근로시간을 임금이나 휴가로 전환해 장기간 휴식을 가능하게 하는 ‘근로시간 저축계좌제’를 내세웠다. 그러나 정흥준 교수(서울과학기술대 경영학과)는 “휴가 사용이 자유롭지 못한 우리나라의 노동 문화하에서는 근로시간 저축계좌제가 적용되기 어렵다”라며 한국의 휴가 사용 현실을 꼬집었다. 실제로 직장갑질119에서 지난해 직장인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법정 유급 휴가를 자유롭게 쓸 수 없다고 답한 비율이 30%에 달했다. B씨는 “한 프로젝트가 끝난 후 쓰는 2~3일 정도의 연차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많다”라고 밝혔고, 화장품 유통 회사에서 근무하는 E씨(회사원·28)도 “3주, 한 달, 6주 단위로 쉴 새 없이 프로젝트가 돌아가기 때문에, 몰아서 일하는 것은 가능하나 몰아서 쉬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답했다. 한상진 대변인은 “공무원도 연가보상비라는 비슷한 제도가 있었지만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했다”라며 “민간부문이나 사기업에서는 훨씬 적용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미 있는 휴식권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개편안까지 도입된다면 근로자의 건강권 또한 보장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건강권 보호의 해결책으로 ‘3중 건강보호장치’(△11시간 연속 휴식 또는 1주 노동시간 64시간 상한 준수 △4주 평균 64시간 이내 근로 △연장근로 총량 감축 의무화)를 내세웠다. 그러나 3중 보호장치의 실행은 건강권 증진보다는 실근로시간의 증가과 무리한 근무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신지영 활동가는 “정부가 제시한 건강권 보호는 근로자의 연장근로를 전제로 삼는 것과 다름없어 접근 자체가 잘못됐다”라고 전했다. 또한 청년정의당 이재랑 대변인은 “고용노동부에서 과로사 기준으로 생각하는 노동시간이 64시간이다”라며 “그 시간에 몰아서 압축적으로 일하게 되면 결국 과로사의 위험에까지 처할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근로시간 줄이고 노동 약자에 귀 기울여야

정부의 개편안은 근본적으로 노동자와 그 현장의 목소리로부터 괴리된 지점이 있다. 거센 비판의 목소리를 직면한 후 지난 14일(화) 정부는 MZ세대의 의견을 청취해 개편안을 재검토하겠다고 발표했으나, 이는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 신지영 활동가는 “특정 세대만이 원하는 것이 따로 있지는 않다”라며 “결국은 젊은 노동자, 여성 노동자, 하청 노동자, 무노조 노동자 등 노동 취약 계층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겪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짚었다. 정흥준 교수와 이재랑 대변인 또한 “법의 맹점을 이용해 노동자가 착취당할 수 있는 곳이 여전히 많이 있다”라며 현실과 밀착된 개편안이 마련돼야 함을 강조했다.

본질적으로는 한국의 실근로시간 총량 자체를 줄일 방안을 다시 고민해야 한다. 한상진 대변인은 “OECD의 평균 근로시간보다 39일 정도를 더 일하는 한국에서 시급한 것은 실근로시간을 단축시키는 것이다”라고 역설했다. B씨는 “안 그래도 인력난에 시달리는 IT업계에서 한 개인의 노동시간을 늘리면 일자리는 줄고 한 사람이 감당해야 할 업무량은 늘 것”이라며 실근로시간이 일자리 문제와도 연관돼 있음을 시사했다. 이재랑 대변인은 “한 사람에게 할당된 노동시간을 늘리면 사측에서는 사람을 고용할 유인이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근로시간 제도 개편에 있어 여러 사회적 문제에 대한 복합적 고려가 이뤄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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