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회 대학문학상 수상자 특별기고

제61회 대학문학상 단편소설 부문에서 가작으로 선정된 「설계자」의 작가 김민정 씨(국어국문학과·15·졸, 필명 하설)의 작품을 싣습니다.

 

먼저 팝콘 기계 이야기를 꺼낸 쪽은 나였다. 어디에도 나가지 않겠다는 희의 손을 억지로 끌고 나와 앉은 카페에서 나는 말했다. 영화관에 있을 법한 큰 팝콘 기계를 사서, 팝콘을 튀기자고.

― 관심 없어.

희가 말했다. 나는 다급하게 덧붙였다.

― 건물 옥상에서 튀기는 거야. 너 팝콘 좋아하잖아. 팝콘 기계 사서 캐러멜 팝콘 튀겨 먹고 싶다고도 말했고.

― 그런 이상한 행동을 왜 해.

― 세상이 엉망이니까.

― 그건 맞지.

― 그러니까 팝콘을 튀겨야지.

― 난 안 해.

그렇게 대답하면서 손을 잘근잘근 물어뜯던 희는, 그날 밤 갑자기 내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한 번 그래 보자고, 거대한 팝콘 기계를 사서, 어디든 건물 옥상에서 팝콘을 튀기자고. 그건 정말 특별한 일이 될 것 같다고. 그렇게 말하는 희의 목소리는 어딘가 결연하고, 조금은 들떠 보였다. 좋아, 그럼 적당한 장소부터 찾아보자. 그렇게 말하며 나는 정말 기뻤다. 희가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니까. 무언가 기대하니까.

세상은 언제나 엉망이고 우린 언제나 힘없이 으깨져 있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에선 건물 옥상에서 팝콘을 튀기는 것쯤이야 지극히 평범한 일일지도 몰라. 어쩌면 가장 특별한 건 옥상에서 팝콘을 튀기는 사람의 마음인 거야. 물론 희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희와 함께 바닷가에 간 적이 있다. 바닷가에 가고 싶다는 희의 말 한마디에 나는 마치 인생의 목표가 바닷가에 가는 것인 사람처럼 허겁지겁 기차표를 예매하고, 희와 함께 택시를 타고 무작정 기차역으로 향했다. 바다에 도착하니 늦은 저녁이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는 겨울 바다는 한적했다. 먼 곳에서 커플 두어 팀이 이른 불꽃놀이를 하고 있었다. 펑, 펑 터지는 폭죽 소리를 들으며 나는 희와 함께 백사장을 걸었다. 겨울 석양을 받아 서늘하게 빛나는 바다와 밀려왔다가 밀려 나가기를 반복하는 백사장의 파도를 바라보았다. 희는 한참 동안 걷기만 했다. 나는 바닷가에 와서 희가 기분이 조금이라도 좋아졌는지 궁금했다. 희의 기분이 좋아진다면 이런 바다쯤 매일매일 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희는 한동안 더 걷다가, 나를 바라보더니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죽고 싶다고 했다.

희가 그 말을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했기에 나는 자리에 돌처럼 우뚝 서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건조하게 죽음을 말하는 희의 뺨은 붉고 흰 손등은 주름 하나 없이 매끈했다. 겉으로 티 나지 않게 안에서부터 차곡차곡 무너져있던 희에게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희는 그동안 자신이 무방비 상태로 파도 앞에 선 사람 같았다고 말했다. 발은 계속 푹푹 빠지고, 파도는 높고, 파도가 칠 때마다 숨도 못 쉴 정도로 고통스러웠다고. 눈물인지 바닷물인지 모를 것이 얼굴에 말라붙고 태양은 작열하고, 파도 앞에 선 채로 희는 계속 가라앉았다고.

― 그래서 궁금했어. 실제로 바다에 와 보면 조금 덜 두려울까 싶어서.

희는 그렇게 말하고, 쓰게 웃었다.

― 파도는 높아 보여도 우리 발치로 오면 겨우 신발 밑창을 적실 정도잖아.

내가 간신히 말했다. 희는 내 말을 듣더니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 나한텐 여전히 똑같은 것 같아. 고작 이렇게 얕은 물일 뿐인데도, 그런데도 힘이 들어.

희는 백사장에 쪼그려 앉았다. 나도 함께 쪼그려 앉았다. 부서진 작은 돌과, 깨진 조개껍데기 같은 것을 집어 들고 만지다 희는 말했다. 파도가 치고 밀려 나갈 때마다 스스로가 너무 깎여나가는 것 같았고, 이젠 모래도 다 빠져나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그리고 희는 덧붙였다. 이 지긋지긋한 삶에 대해 이젠 아무런 희망도 없으며, 다가오는 파도를 무력하게 맞고 있을 뿐이고, 파도가 쓸고 나간 자리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희의 말을 들으며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내게, 희가 덧붙였다. 영원히 아무것도 남지 않을까 봐 두렵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희의 얼굴은 너무나 쓸쓸했다.

그날 밤, 나는 희에게 줄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내 친구 희야. 더는 살기 싫다고 말하는 너에겐 찬란한 젊음이 있어. 괴로워하다가도 웃는 네 미소는 천진하고 여전히 우리에겐 더 많이 울 날도 더 웃을 날도 남았으니 그런 아픈 말은 하지 말자. 우리는 무섭도록 젊으니까. 그러니까 앞으로 무엇이 파도처럼 밀려오든 나와 함께 살…….

나는 그쯤 쓰다 그만두었다. 차마 문장을 끝맺을 수 없었다. 내가 함께 살아있자고 말한다고 해서 희가 살아있는 것, 그 또한 안온한 세상에 사는 나의 지극한 낭만이 아닌가. 나의 진심 어린 낭만이 통하기엔 희의 세상은 한없이 춥고 연약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나는 희가 바닷가 백사장에서 했던 말들을 생각했다. 파도 앞에 암초처럼 쭈그려 앉아 있던 희를 생각하는 내내 머릿속에서 파도가 철썩였다.

*

팝콘 기계를 주문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희에게 건물 옥상에서 팝콘을 튀기자고 말 한 지 며칠 만에, 함께 팝콘을 튀기러 건물을 오를 수 있었다. 

희와 함께, 내 자취방이 있는 건물 옥상으로 향한다. 팝콘 기계가 너무 무거워서 희와 나는 안간힘을 써서 겨우 기계를 옮긴다. 어두운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 올라가다, 삼 층을 올라갈 때쯤 내가 말한다.

― 그때 백사장에서 파도 얘기를 했잖아.

― ……응.

― 그땐 바로 얘기해주지 못했지만. 실은, 어떤 높은 파도가 몰려와도 백사장엔 남는 것들이 있어. 예를 들자면, 깨진 조개껍데기라든가, 아주 작은 조약돌이라든가, 불가사리라든가.

― 그런 것들로 뭘 할 수 있어?

― 그건 잘 모르겠어. 하지만 그건 오래 네 백사장에 머무를 거고 어쩌면 그게 다음 파도를 견딜 힘이 될 거야.

― 깨진 조개껍데기라도?

― 응.

희와 나는 견고한 자물쇠가 채워진 문 앞에 선다. 희는 조금 당황한 듯 자물쇠가 있다며 말꼬리를 흐린다. 나는 자물쇠 앞으로 다가가 자물쇠에 손을 가져다 댄다. 옥상으로 향하는 자물쇠는 그저 얼기설기 걸쳐져 있기만 했을 뿐, 손으로 뜯어내니 힘없이 무너져내린다. 

― 이거 봐. 이건 자물쇠지만 사실은, 자물쇠 모양 장식이었을 뿐이야.

내 말에 희는 가벼운 탄성을 내며 옅게 웃는다. 복잡하게 얽힌 녹슨 체인들을 모두 풀어낸다. 녹슨 쇠 냄새가 진득하게 손에 남는다. 어쨌거나, 상관없다. 희와 나는 옥상 문을 연다. 차가운 겨울바람과 함께, 환한 빛이 들어온다.

옥상에 팝콘 기계를 설치하고,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는다. 가방에서 옥수수가 담긴 봉지를 꺼내는 나를 보며 희가 말한다.

― 정말이지 생각할수록 이상해. 이런 걸 누가 해.

― 우리가 아니면 아무도 할 수가 없으니까. 우리가 해야지.

팝콘 기계 안에 옥수수를 넣고, 기계를 작동시킨다. 우린 숨을 죽이고 팝콘 기계를 바라본다. 뜨겁게 볶아지던 옥수수가 어느 순간, 펑 소리를 내며 튀어 오른다. 이윽고 꽃처럼 하얗고 보송보송한 팝콘이 팡, 팡 쏟아진다. 희는 한동안 팝콘 기계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타닥, 타닥, 팝콘 튀겨지는 소리가 느려질 때쯤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 있잖아, 서정아. 다른 것도 튀길 수 있을까?

희와 나는 팝콘 기계 안에 희가 넣어버리고 싶은 모든 것을 넣어보기로 한다. 먼저 비슷비슷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팝콘 기계 안으로 들어간다. 사람들은 기계 안으로 떠밀려 들어가며 얼굴을 일그러뜨리다 이윽고 펑, 튀겨진다. 다음으론 매달 빠져나가는 좁은 오 평 방의 관리비가, 다음으론 삐뚤삐뚤한 글씨로 쓰인 어느 계절의 일기장이, 그리고 지긋지긋한 젊은 날들과 끝이 없는 달력, 보내지 못한 메시지와 마지막이 된 인사들……. 이미 들어간 것들을 팝콘 기계를 툭툭 쳐서 내려보내고 있던 나는 문득 희를 바라본다. 그리고 거기엔 해일만큼 거대하고 깊은, 살짝 녹아내린 검은 빙하가 있다. 희가 슬픈 눈으로 웃으며 말한다.

― 내 안에 있던 거야.

희와 나는 함께 그것을 팝콘 기계 안에 밀어 넣는다. 육중한 그것의 표면은 너무 춥고 슬프고 외로워, 그것에 닿은 내 손바닥은 너무나 차가워 동상이 걸릴 듯 홧홧하다. 

― 아무래도 캐러멜을 넣어 줘야겠어.

나는 가방에서 캐러멜을 꺼낸다. 희는 내가 캐러멜을 꺼내는 것을 보고, 잔뜩 차가워진 두 손을 볼에 가져다 대며 옅게 웃는다. 희가 혼잣말처럼 말한다.

― 여전히 세상은 엉망이네.

그러고선 잠시 침묵하다 덧붙인다.

― 그래도 조금은 달콤해졌어.

나는 캐러멜을 넣은 통을 닫고, 희의 표정을 살핀다. 희는 기쁨인지 무엇인지 모를 표정을 지으며 팝콘 기계를 바라본다. 힘들지만 젊은 것인지 젊어서 힘든 것인지 모를 숱한 날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고, 우리가 넣은 모든 것들에 달콤하게 캐러멜이 묻는다.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옥상을 채운다. 팝콘은 팡, 팡 터지고 흰 꽃들은 자꾸만 피어나고, 마침내 빙하가 꽃이 되는 순간을 기대하면서, 나는 희와 함께 그 아름다운 풍경에 두 발을 딛고 서서 오래오래 머무른다.

삽화: 박재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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