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쁨 강사(농림생물자원학부)
유기쁨 강사(농림생물자원학부)

팬데믹을 경험하며 우리는 낯선, 기묘한 느낌을 은연중에 공유했습니다. 마스크, 격리 체험, 서로를 회피하는 시선, 누군가 지나간 자취마다 뿌리고 바르는 소독제… 예전에 무심코 했던 일들은 더 이상 예사롭지 않게 됐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공유하는 낯선 느낌은 단지 팬데믹 때문만은 아닙니다. 기후 위기가 드리운 그림자는 이제 내 모든 일상에 천천히 스며들고 있습니다. 과학철학자 브뤼노 라투르는 『나는 어디에 있는가』에서 말합니다. “예전에 내 몸을 아무 죄책감 없이 데리고 다닐 수 있었다는 기억은 여전하건만. 하지만 지금의 난 내 등 뒤에 길게 늘어지는 이산화탄소의 띠를 애써 뽑아내야만 한다고 느끼고, 그 느낌은… 내 움직임을 사사건건 방해한다”라고. 우리는 대체로 그 말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라투르는 팬데믹과 격리의 경험, 나아가 기후 위기로 인한 낯선 경험을 이야기하기 위해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카프카의 『변신』을 가져옵니다. 

“눈을 뜨면서 나는 카프카의 주인공, 즉 단편 <변신>에서 잠자던 중에 바퀴벌레, 게, 또는 갑각류 해충으로 변한 사내가 겪는 고뇌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 사내는 졸지에 예전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출근하지 못하게 된 자신을 발견하고 […] 저 자신이 ‘끔찍한 벌레’가 되었음을 느낀다.”

소설 속에서 벌레가 된 그레고르와 함께 라투르는 묻습니다. “내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변신』에서 벌레가 된 그레고르의 가족은 벌레(그레고르)를 거북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자신들과 다른 종류의 비인간 벌레가 마치 없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하고, 가능하면 눈에 띄지 않게 가둬 놓으려고(자신들로부터 공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분리하려고) 애씁니다. 그리고 마침내 벌레가 사라지자(그러니까 그를 죽이고 나서) 모두 기뻐하며 소풍을 가지요.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한 짧은 소설입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격리 생활을 경험하면서, 그리고 우리 일상에 그림자를 드리운 기후 위기의 상황 속에서 라투르는 이 소설을 전복적으로 다시 읽습니다.

라투르는 특히 ‘벌레-되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레고르가 털로 덮인 제 여섯 개의 절지를 디디고 다시 일어나는 것이야말로 마침내 그가 제대로 움직이는 일, 그리고 격리에서 스스로를 구출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일일 거야.”라고 말입니다.

그레고르의 부모와 누이 그레테는 벌레-되기를 거부할 뿐 아니라 비인간 벌레(그레고르)와의 단절을 선언하고 나아가 혐오를 발산하는데, 그것은 라투르가 볼 때 ‘결국 무정한 비인간(inhuman)이 되고 마는 길’입니다. 위기 상황에서 “변신해 버린 건, 기후 위기와 팬데믹이 ‘괴물’로 변모시킨 건 바로 그들 아니야?”

라투르가 제안한 ‘벌레-되기’와 관련해서 생각을 확장해 봅니다. 인간에게서 유래한 이 생태 파괴의 시대를 경험하는 상황에서 벌레-되기란 무엇일까요? 두 발로 서서 세계의 다른 존재를 내려다보고 판단하고 비인간을 혐오하는 ‘에고중심적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이 세상을 ‘기어다니며’ 탐색하고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듣고 냄새 맡으며 땅과의, 세계와의 연결을 새롭게 감각할 때, 오히려 땅에 밀착된 새로운 상상과 대안을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라투르의 말대로 이 격리의, 혹은 ‘변신’의 시간은 어쩌면 진정 중요한 것을 되묻고 생각해보는 가운데 중요한 변화의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것이겠지요.

현대 세계에서는 어떤 의미에서든 스스로를 벽에 가두는 자가 아니라, ‘벽을 드나드는 자’가 요청되고 있습니다. 지난 학기 수업에서 한 학생이 과제의 제목으로 ‘담을 넘는 대학생이 되자’라고 썼던 게 계속 기억에 남습니다. 이제 올해 3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번 학기에는 낯선 목소리라도 조금 더 귀 기울여보고 편견으로 이뤄진 견고한 울타리를 넘는, 적어도 한번은 담을 넘어보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해보면 어떨까요? 이 세계의, 생의 신비를 느끼고 또 탐구하며 한 걸음씩 함께 걸어가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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