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 왜곡에 맞설 4·3사건 치유의 노력

이념 갈등과 민간인 학살로 얼룩졌던 제주4·3사건(4·3사건)이 발생한 지 7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간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2003년에는 정부 차원의 사과를, 2014년에는 국가 추념일 지정을 끌어내며 화해와 치유를 위한 노력이 지속돼 왔다. 그러나 일각에서 4·3사건의 진실을 뒤흔들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며, 제주도는 다시 몸살을 앓고 있다.

 

색깔론으로 물든 4·3사건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4·3특별법)에 따라, 2000년부터 3년간 문헌자료 검토와 증언 채록을 거쳐 4·3사건에 대한 진상조사가 시행됐다.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4·3사건은 1947년 자주통일을 논하는 합법적 집회였던 삼일절 기념 제주도대회에서 경찰의 발포로 6명의 민간인이 사망한 사건으로 시작됐다. 이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와 정부 토벌대 사이에 무력 충돌이 일어났고, 토벌대의 진압 과정 중 무고한 제주도민이 희생된 것이 진상조사로 밝혀졌다. 

4·3사건 당시 정부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은 정당화할 수 없는 행위다. 제주4·3평화재단 고희범 이사장은 “채 500명이 되지 않던 무장대를 진압하기 위해 3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어떤 논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라고 강조했다. 허상수 전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는 “4·3사건은 통일 독립운동이자 자주 운동”이라며 “그렇기에 더더욱 토벌대가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것은 국가에 의한 반인륜범죄”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진상조사가 마무리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4·3사건에 색깔론을 입혀 민간인 학살을 정당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달 21일, 제주 시내 곳곳에 ‘제주4·3사건은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하여 김일성과 남로당이 일으킨 공산폭동이다!’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걸렸다. 이에 앞선 지난 2월, 국민의힘 최고위원 경선에서 태영호 의원이 같은 주장을 해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이에 대해 고희범 이사장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회의를 통해 12대7의 표결 결과로 봉기를 결정했음을 진상조사 보고서로 알 수 있다”라며 “4·3사건이 북한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는 색깔론은 어불성설”이라고 단언했다.

 

비극을 외면하는 왜곡의 정치

4·3사건의 진실을 폄훼하려는 시도의 근원은 5.16 쿠데타 이후 들어선 군사 정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희범 이사장은 “우리 사회에 축적된 반공주의 이데올로기가 군사 독재 동안 재생산되며 4·3사건에 오명이 씌워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4.19혁명 직후 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당시 진상조사를 주도하던 이들이 5.16쿠데타 이후 국가보안법을 빌미로 옥고를 치르며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 그 후로 제대로 조사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1980년대까지 4·3사건은 교과서에 폭동으로 기술됐다.

4·3사건을 왜곡하려는 이들의 의도는 어떻게 분석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박태균 교수(국제학과)는 “4·3사건의 진실을 왜곡하고자 하는 시도의 저의는 결국 정치적 의도를 달성하는 것에 있다”라며 “4·3사건의 왜곡 논리로 여순사건과 5·18 민주화운동에도 흠집을 내 정치적 정당성과 결집을 확보하려는 시도”라고 답했다. 허상수 전 교수는 “사회가 다원화되고 민주화되면서 반공 분단 체제가 흔들렸다”라며 “이는 당시 주류였던 이들에게 조바심을 불러일으켰다”라고 왜곡의 배경을 분석했다.

이런 왜곡 시도는 지금껏 이뤄진 화해와 치유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다. 박태균 교수는 “진상조사 이후 4·3사건이 국가에 의한 부당한 폭력이었다는 것이 확정적 사실로 받아들여지며 해원(解冤)의 노력이 이어졌는데 이를 부정하는 것은 무고한 희생자들에 대한 가해를 합리화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고희범 이사장은 “증거도 없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수많은 민간인에게 오명을 씌우는 것은 유족의 상처를 헤집는 반인륜적인 일”이라고 비판했다.

 

진실과 해원을 향한 발걸음

4.3사건의 왜곡을 막기 위해서는 여러 방면의 노력이 필요하다. 제주특별자치도와 제주4.3평화재단은 4·3사건과 그 해결 과정을 진실하게 기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4·3사건 기록물에 대한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다. 고희범 이사장은 “4·3사건 기록물은 냉전이 어떻게 마을 공동체까지 상처를 입혔는지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기록물이며, 이후 국가 폭력에 대한 국가의 공식 조사와 사과를 이뤄낸 시민과 유족들의 자발적인 화해 운동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라고 평했다.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 한권 위원장은 “4·3사건 기록물의 세계 기록 유산 등재는 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화해 과정을 세계인들과 공유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4·3사건을 정의할 수 있는 명칭 부여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현재 4·3사건은 공식 문서에서 ‘사건’이라는 중립적인 용어를 사용 중이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항쟁, 봉기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박태균 교수는 “일단은 소모적인 논쟁을 피하고자 온전한 진상규명 전까지는 ‘사건’이라고 부르는 게 바람직하다”라고 설명했다. 다만 충분한 진상조사를 통해 4·3사건의 성격이 확립되면 그 성격을 드러내는 명칭을 써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허상수 전 교수 또한 “역사 교육과 희생자 명예 회복 등을 위해 4·3사건의 정신을 담은 명확한 명명이 필요하다”라고 밝혔다.

 

4·3사건의 왜곡은 무고한 희생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이며, 비극의 반복을 암시하는 것이기에 멈춰져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4·3사건의 진실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며, 다시금 상처 입은 제주도가 치유를 마무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