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성 차장(취재부)
조은성 차장(취재부)

“이 드라마 첫 회만 일단 찍먹해보고, 별로면 다른 걸로 갈아타지 뭐.” 때때로 일부 대학생의 대화에서 오가는 ‘찍먹했다’는 표현이 눈에 띈다. 탕수육에 소스를 붓느냐 마느냐를 따지는 논쟁에서부터 유행한 이 표현은 이제 일상에서 호기심에 한 번 접해보고 마는 저울질을 뜻하는 의미로까지 확장됐다. 볼 것도 읽을 것도 풍요로워진 시대에 우리의 구미를 당기지 못하는 이야기가 도태되는 것은 꽤나 당연한 수순이다.

나 역시 가볍고 먹기 좋게 조리된 정보를 골라먹는 데 익숙한 세대 중 한 명이기에 더더욱 매력적이지 않아서 선뜻 손길이 가지 않는 것들의 기구한 운명을 조명하고 싶었다. 마침 신문사 책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던 학술서를 처분하던 시기라, 버려지는 이 책을 만든 학술 출판을 한 번 맛보자는 안일한 마음으로 기획안을 적었다. 호기롭게 취재를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아 뭔가 잘못됐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먼지가 켜켜이 쌓인 도서관 한 켠의 두꺼운 책만큼이나 해묵은 학술 출판계의 문제들을 고작 지면 한 장에 담아낼 수 있다고 자신했던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내가 맛본 학술 출판의 현실은 복잡하고 씁쓸했다. 학술 출판이 우리 사회의 지식 문화를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에는 공감했지만 그 이상의 논의를 풀어갈 뚜렷한 방도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출판이 등한시돼 왔던 역사적 배경, 출판이 하청업체처럼 경시되는 현실, 전문 후대 편집인을 양성하기 어려울 만큼 젊은 세대에 외면받는 암울한 전망까지 다 얽힌 이 현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비슷한 어려움을 공유하면서도 개별 출판사와 각 취재원이 조금씩 다른 입장에 놓였다는 것을 뭐라 정리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대부분이 이 책의 몇 장을 겨우 넘기다 손을 뗀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강한 영감을 받아 사유한 극소수의 어떤 이가 세상을 바꾸리라는 가능성에 기대 책을 만드는 누군가의 사명감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명쾌한 해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속속들이 드러나는 그들의 고충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기사를 마감하고 칼럼을 작성하는 지금, 내 기사가 결국 학술 출판과 대학 출판을 그저 맛보기용으로 전달하는 데 그쳤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낀다. 며칠 밤을 지새우며 구성을 고민했던 열정과는 달리 기사는 출판계에 노력을 촉구하는 다소 납작한 결론으로 마무리됐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히 덧붙이고 싶다. 학술 출판계의 내부적인 쇄신도 일차적으로 필요하지만, 그들이 꺼내놓는 두껍고 묵직한 현실들을 경청하려는 우리 사회의 문화적인 뒷받침이 부재하다면 그들의 노력은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이야기는 무겁고 텁텁한 맛일 확률이 높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출판한 학술서와 전하는 메시지에 깊숙이 손을 담글 때에야 비로소 학술 생태계를 지탱하는 학술의 묵직함을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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