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철원 교수(국어국문학과)
서철원 교수(국어국문학과)

“전공의 벽을 넘어 그대가 전설이 될 시간입니다.” 이번 학기 초, 관정관 잘 보이는 자리 눈에 띈 글귀였다. 다전공을 선택한 재학생 선배들의 경험을 신입생들과 공유하는 뜻깊은 자리를 장식하는 말이었다. 여기서 부정적인 어감이 드는 ‘벽’ 대신에 ‘경계’라는 말을 쓰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국어 선생다운 생각이 얼핏 들었다. 하지만 얼마나 전공이 지긋지긋했으면 벽이라 표현했을까? 자기 마음보다는 남들이 정한 평가에 따라 주어진 전공에 정을 품으라는 것은 억지춘향 노릇일 따름이다. 

벽을 경계로 섣불리 교정하기에 앞서, 한 인간으로서 저 벽에 먼저 애통했어야 했다. 전공을 벽으로 생각하는 수많은 이들과 수업에서 만나며, 필자 역시 저 벽을 쌓는 일에 이바지했음을 고백한다.

세상은 융복합을 외친다. 통섭형 인재가 되라고도 한다. 어느덧 그런 외침과 다그침도 수십 년째라, 청년 시절 그런 소리를 들었던 이들도 중년이 됐다. 물리학 전공자가 드럼도 치고, 필라테스도 하며 사서오경을 줄줄 외는 세상이 온다는 걸까? 그러면 ChatGPT며 인공지능에 꿀리지 않는 인간의 존엄이 확보될 수 있을까? 그건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외고며 과학고처럼 하나만 잘하라는 영재 교육의 불변함이나, 20대 초반에 메사추세츠 공대 박사가 됐다고 과학 천재 소리를 듣던 이가 경영 실패를 책임지지 않는다고 비난받는 신문 기사 등을 보면, 융복합과 통섭형 인재의 길은 여전히 멀고도 험하다.

이런 상황에 교육기관과 교육자의 책임이 전연 없다고는 할 수 없겠다. 누구나 교육의 붕괴, 특히 공교육 현장의 어려움과 교권의 약화를 성토한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학생을 위해 인내하고 기다려주는 대신에 사교육이든 뭐든 알아서 준비해 오라 푸념하지는 않았던가? 수업 시간에 수준 높은 한문 강독에 참여하려면 번역원이든 서당이든 강의실 바깥에서 한문 실력을 키워 와야 한다고 했다. 이게 과연 교육적으로 옳은 일일까? 물론 대학에서 일일이 다 가르쳐줄 수야 없겠지만, 돌이켜보면 중고등학교에서도 상황이 그리 다르지 않았다. 학교는 평가하는 곳이며, 공부는 학생이 알아서 해야 마땅했다.

자유전공학부나 학생설계전공 등 좋은 제도들이 보완책으로 있다. 그러나 학생이 준비해 학교와 교육자에게 평가받는 방식 자체는 그리 다르지 않았다. 세계의 문학 이론을 비교하는 전공을 학생이 설계했더니, 전공 제목에 국적이 표시되지 않았다고 퇴짜를 놓았던 사례가 있었다. 인문학 안에서의 통섭에도 이런 시각을 지닌 분들이 있으니, 당국에서 부르짖는 낭만적인 융복합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다시 저 벽보로 돌아가자. ‘그대가 전설이 될 시간’이라 한다. 지난 세기말 유행했던 <에반게리온>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 주제가에 “소년이여, 신화가 되어라”라는 구절이 있었다. 세기말에 어른들이 만든 세상은 다 망했으니, 새로운 세대가 신화가 되라는 뜻이겠다. 그러던 세기말의 신세대도 낡은 기득권이 돼, 새로운 신화로써 척결 당할 처지가 됐다. 그래도 이왕이면 세상을 바꿀 신화가 된다면 좋았겠는데, 그 대신 전설이 되겠다고 했다. 결국 진로와 취업을 위한 간담회라면, 저 전설이란 훌륭한 취업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재학생 간담회와 전설이 된 졸업생들의 특강, 학교와 교수는 그 사이 어디에 머물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인문대학에서 신입생을 위해 마련하고 있는 ‘삶과 인문학’ 강좌에 몇 차례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중에 전공을 소개하는 학과 교수의 강연이 상당히 큰 비중을 지닌다. 죄송하오나 필자의 소감으로는 학생들이 전공에 대해 잘 몰라서 전공 선택이나 전공에 정을 두기가 어렵게 된 것만은 아닌 듯했다. 인문학 강연에 등장하는 영웅 신화까지는 못되더라도, 나름의 전설이 되겠다는 희망을 주고자 학생들의 입장에 더 다가가야 하지 않았을지 새삼 반성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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