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슬(미학과 석사과정)
김한슬(미학과 석사과정)

글쓰기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시작해볼까 한다. 아이스킬로스의 희곡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에서는, 먼 옛날 자연상태의 비참과 혼돈 속에서 허덕이던 인간이 어떻게 해서 지금과 같은 삶을 살게 됐는지 프로메테우스가 진술하는 장면이 나온다. 지상의 모든 동물 중에 가장 볼품없이 태어나는 인간을 연민한 그가 신들의 소유였던 불을 훔쳐다 줬고, 이것이 곧 인류 문명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됐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그런데 사실 불은 이 불경스러운 거인 신이 인간에게 준 수많은 선물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불과 더불어 오늘날 우리가 일상에서 향유하는 노동과 사유, 교감의 기술(techne)은 모두 프로메테우스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글쓰기 역시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위해 최초로 발명하고 전수한 기술이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그들에게 모든 것의 기억이요 뮤즈들의 어머니*인 글쓰기를 가르쳤소.” 그에 따르면, 과거 인간은 삶의 모든 자율성을 외부의 힘에 강탈당한 채, 일체의 지각과 의미(sens)의 경험이 봉쇄된 암흑 상태 속에서 그저 무차별적으로 뒤섞여 살았다. 그러나 기술의 도래와 함께 인간은 신들의 권능과 지배에 예속됐던 기나긴 어둠의 시간을 일거에 폭파시켰으며,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분명히 느끼고 인식하며 새로운 관계를 창출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됐다. 이 같은 변화는 인간에게 생존과 자립, 진보를 넘어서 ‘존재론적 단절’을, 즉 기존의 존재 방식과 결별하고 자기 존재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정초하며 재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사건이었다. 프로메테우스가 전수한 다른 모든 기술처럼 글쓰기에도 역시 그런 단절의 계기가 고유하게 내포돼 있었으니, 그건 바로 ‘기억’이라는 힘이었다.

실로 글은 인간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그 모든 걸 영원히 기억하고 보존할 것이다. 글쓰기는 결코 훼손되지도 종결되지도 않을 기억의 영속성을 약속한다. 이 같은 기술의 출현이 인간에게 가져온 존재론적 단절은, ‘인간으로 존재함’의 의미를 규정하는 유한성에서 해방될 가능성을 최초로 마련했다는 점에 있다. 인간은 사멸하지만 인간의 실존과 활동은 글의 기억을 매개로 영원히 지속하리라. 글 속에서 모든 순간은 살아있는 현재처럼 반복되리라는 점에서 글쓰기는 지나간 과거를 다가올 미래로 투사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글쓰기가 저항하는 것은 망각이 아닌, 모든 것을 부패시키고 무화하는 시간의 절대성이다. 한편으로 이미 사라진 것의 흔적으로서의 글은 글쓴이의 예고된 죽음을 환기한다. 그러나 글은 동시에 그런 흔적에 깃든 생명력을 보존하고 운반함으로써 죽음의 집행을 유예시키고, 글쓴이가 (글쓴이 자신이 부재할) 미래의 삶을 선취하게 한다.

하지만 모든 이가 글쓰기와 기억의 연관을 반긴 것은 아니었다. 글은 단지 사물을 복제하는 영혼 없는 글자들의 모음일 뿐이라 비난했던 플라톤이 그 대표적 사례다. 그러나 글은 대상과 사건을 단순히 재생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대상과 사건의 체험은 글쓰기에 선행하지 않는데, 글쓰기 자체가 대상과 사건에 형태를 부여하고 이를 세계 속에 출현시키는 창조적 실천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미분화된 덩어리로서의 감각적 현실에 일정한 지각/의미의 질서를 부과한다. 의미 없이 피어나고 스러지는 감각과 경험의 연속체가 절단되는 가운데, 대상과 사건은 즉물적 상태에서 구제돼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 대상과 사건, 나아가 세계에 대한 체험의 지평은 이렇게 생성된다.

글쓰기는 시간의 소멸성에 맞서 자신을 보존하고, 세계와의 관계 속에 들어서는 인간 실존의 조건이며 형식이다. 글쓰기는 죽어가는 인간에게 불멸성의 표식을 기입하고, 현실을 창조하고 변형할 역량을 부여했다. 그래서일까. 글쓰는 인간이 자신을 창조한 프로메테우스의 형상과 닮아 보이는 것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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