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우 부장(사회문화부)
정연우 부장(사회문화부)

세상에는 내가 미처 다 짐작할 수 없는 고통이 지나치게 많았다. 고통은 쉽게 사라지거나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 고통의 순간을 목도할 때마다 나는 고통이 아무것도 아니었으면 했다. 한편 사랑은 정반대였다. 사랑은 시간이나 죽음 같은 불가항력 앞에서 쉽게 무력해졌다. 그럴 때면 사랑은 부디 아무것도 아니지 않았으면 했다. 고통을 이기는 허무와 허무를 이기는 사랑 사이에서 나는 늘 줄다리기를 했다. 대개는 허무가 이겼다. 사랑이 무력해지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으니 허무가 고통을 이기면 사랑은 굳이 무언가가 될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글을 쓰는 일은 이런 나의 고질적 허무에 천착하고자 했던 어린 욕망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자발적 쓰기의 시작은 일기였다. 부질없게 느껴지던 하루를 어떻게든 아름답게 박제해 두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이는 이내 소설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를 허구의 이야기를 쓰는 일로 이어졌다. 소설을 쓸 때는 이 활자들이 정확하고 온전하게 내 것이라는 사실이, 그렇기 때문에 이 안에서는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면서 이 안을 떠나면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는 것이 작은 안심이 됐다.

한편 대학신문사의 문을 두드린 것은 더 큰 욕심에서였다. 내 글이 읽혔으면 싶었다. 읽히지 않는 글은 무의미하다는 믿음과 신문에 실린 글이라면 사람들이 읽으리라는 확신 아래 나는 신문사에 들어왔다. 신문이라는 것 자체가 쇠퇴해가는 매체고, 나부터도 신문을 잘 읽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우스운 확신이었다. 학교 곳곳에 놓인 대학신문 가판대에는 뜯기지도 않은 신문 뭉치가 그대로 놓여 있는 날이 잦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렇든 저렇든 상관이 없었던 것 같다. 많은 사람에게 읽히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잘 읽히는 글을 쓰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읽히지 않는 기사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최선을 다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나의 최선에 의아해지는 때가 적지 않았다.

퇴임을 앞둔 지금에서야 어렴풋이 깨달았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에 무의미에 초연할 수 있었다. 기사를 매개로 나는 나로 가득 찬 세계로부터 타인과 맞닿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세계로 발을 들였다. 타인의 눈을 빌려 관찰하고, 타인의 목소리를 빌려 썼다. 그럼으로써 고통이 결코 아무것도 아닐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제서야 온전히 내 것인 글에 알량한 안심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이야기가 담긴 글에 도저한 안도를 느끼게 됐다. 그래서 내 질문을 받아준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되지 않기를, 내가 쓴 글이 타인의 이야기를 관성적으로 나열한 것에 불과하지 않기를, 내가 쓴 글이 그저 신문 한 귀퉁이에 머무르지 않기를 바라게 됐다. 글을 쓰는 일이 허무에의 매몰에서 허무를 벗어나려는 의지로 나아가는 순간이었다.

허무한데 허무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어떻게 할 수 있느냐고 언젠가 누구에게 물은 적 있다. 허무하지 않으려는 노력 속에만 허무하지 않은 순간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답이 돌아왔다. 그 답의 의미를 나는 이제야 안다. 그리고 허무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허무하지 않고 싶다는 의지 속에서만 가능하다. 고통이 아무것도 아닐 수 없다면, 그 무엇도 아무것도 아니지 않았으면 좋겠다. 특히나 사랑만큼은 꼭 확실히 그러기를. 그리하여 결코 아무것도 아닐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사랑이 무력해지지 않기를, 고통도 허무도 항상 사랑이 이기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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