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형(생물교육과·23)
박규형(생물교육과·23)

 

강남역 11번 출구의 기억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곳에는 어느 한 이가 소리 없이 쓰러져 있었다. 수많은 인파가 그를 스쳤으나 심지어 잠깐의 눈길조차 아까워하는 눈치였다. 다시 보니 그는 팻말을 잡고 엎드려 있었다. “도와주십시오.” 마치 그를 지나치는 모든 이의 발에 절하듯 하며.

이날 이전에는 미처 못 보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무심히 지나치는 이들과 발에 채는 그의 사이에는 도무지 서로를 못 알아보게 할 견고한 벽이 있었으며, 인간 존엄은 물질 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 그리된 이유를 궁금해하다 달포가 지났다. 그리고 우리가 생명체라는 사실과 생물학에서 실마리를 얻고 일종의 답을 찾았다. 환원주의적 관점에서라면, 거기 견고한 벽이 선 이유를 생명의 시작에서 볼 수 있을 테니.

모든 생명은 놀라울 정도로 자기(self)와 비자기(non-self)를 잘 구분한다. 이것은 생명 진화의 역사에서 세포막 구조의 등장과 함께 시작됐을 것이다. 다시 말해 생명 등장의 초기부터 모든 생명은 비자기를 향해 자기의 견고한 성을 쌓았다. 이후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자기의 보전은 최우선 과제가 됐다.

그래서 홀로 자기를 보전하는 게 어려울 때, 생명은 ‘확장된 자기’를 형성해 각자의 보전을 위해 협력하기도 했다.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의 등장이 그랬고, 최초의 다세포 진핵생물 출현이 그랬다. 그러나 확장된 자기에 대해서도 비자기는 존재한다. 즉, 확장된 자기는 ‘유한히 확장된 자기’였다. 또 확장된 자기는 일종의 계약 관계였다. 확장된 자기의 효과적 보전에 기능하지 못하는 자기는 머지않아 추방되니 말이다.

인간도 생명을 가진 존재이므로 생명의 시작과 함께 탄생한 이런 ‘자기-비자기’의 특성은 인간 무의식에 존재한다. 즉, 비자기에게 자기의 높은 성이 허락되고 확장된 자기를 이루게 되는 것은 오직 비자기가 자기에게 우호적 기능을 할 때다. 이제 다시 11번 출구로 돌아가자. 엎드려 있던 그는 지나치는 이들에겐 철저한 비자기였다. 그들에게 있어 그는 단지 통행을 위험하게 하는 장애물이 아니었겠는가? 견고한 벽은 선악 차원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존엄’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존엄은 높고 엄숙해 범할 수 없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러므로 생명이 존엄하다면 어느 것도 존재 자체와 존재를 존재이게 하는 그 본질에 우선될 수 없다. 그렇다면, 생명 있는 모든 존재는 존엄한가?

존엄의 근거는 생명의 역설적 아름다움에 있을 것이다. 열역학 법칙에서 보듯, 생명의 운명은 무질서의 증가라는 우주의 원리 가운데 던져졌다. 그러나 생명이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나아가며 창발적 특성을 나타내고 조직화하는 것은 우주의 원리에 저항하는 경이로운 일이다. 그렇지만 생명의 모든 내부 반응은 무질서를 증가시키므로 그에 순응하기도 한다. 한편 모든 생명은 언젠간 반드시 스러져가며 그 운명에 순응한다. 하지만 끈질기게 자기와 유사한 새로운 생명을 재생산하며 던져진 운명에 저항한다. 동시적 순응과 저항은 역설적이며,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이런 역설의 연속엔 무엇보다 근본적인 역설적 아름다움이 있다.

당신이 이에 동의한다면, 생명의 존엄은 적어도 우리에겐 참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존엄은 정말로 ‘존엄하다’. 그러므로 앞서 본 ‘자연스러운 것’은 더는 자연스럽지 못하다. 자기-비자기 틀의 배타성도, 우호적 기능의 여부도, 또 우리를 옭아매는 물질조차도! 무한한 존엄과 가치에 어떤 흠도 낼 수 없다. 그러니 순수한 존엄 앞에 견고한 자기의 성은 허물어져야 한다. 또 우리는 그렇게 ‘유한히 확장된 자기’에서 벗어나, ‘무한히 확장된 자기’, ‘그 너머 어딘가’로 향할 것이다.

생명의 존엄이 참된 만큼, 나는 크로포트킨의 “만물이 서로를 돕는”, 톨스토이의 “네 안에 있는 신의 나라”가 완성되는 세상을 꿈꾼다. 존엄이 그 빛을 온전히 발하기까지 모든 생명의 달음질이 그치지 않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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