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현 기자(사회문화부)
전상현 기자(사회문화부)

 

“누가 세 줄 요약 좀.” 온라인에서 긴 글을 읽다 보면 이런 댓글, 하나쯤 있다. 네다섯 줄은 긴 것 같고 한 줄이나 두 줄은 너무 줄인 것 같으니까. 아무래도 서론-본론-결론의 문단 구조, 그리고 삼단논법의 논리구조에 익숙한 우리에게 세 줄 요약은 가장 적절한 타협점이었을 것이다. 일종의 ‘밈’으로 시작된 이것은 어느 순간부터 절실한 요청사항이 된 것 같다. 세 줄 요약기라는 프로그램이 등장했을 정도니 말이다. 세 줄 요약이 없으면 글을 읽지 못하는 이 증상을 내 맘대로 ‘세 줄 요약 증후군’이라 부르기로 했다.

세 줄 요약 증후군에는 효율적 사고의 본능이 투영된다. 인간은 효율적인 사고를 통해 가장 적은 에너지로 원하는 결론에 다다르고자 한다. 현대 사회의 빠르고, 강렬한 자극은 사고 과정을 단축하려는 인간의 본능에 호응해 결론에 이르는 시간을 극적으로 단축해냈다. 세 줄 요약 증후군은 이런 효율적 사고의 본능이 극대화돼 나타난 것이다. 극단화된 효율적 사고는 오직 결론만을 향해 돌진한다. 결국 세 줄 요약 증후군은 이분법에 기반한 단선적인 결론 선호, 단편적인 사고 체계에 대한 맹신을 수반한다. 글을 읽는 개인에게만 세 줄 요약 증후군이 나타난다면 유감을 표하고 말 일이지만, 최근 사회 현상을 해석하고 한 사람을 이해하는 데까지 확장된 세 줄 요약 증후군은 공동체를 갉아먹는다. 세 줄 요약 증후군이 만연한 사회에서 현상의 본질은 가려지고 왜곡된 본질 속에서 구성원은 상처받기 때문이다. 

세 줄 요약 증후군이 횡행하는 사회는 집단과 개인을 마음대로, 다만 효율적으로 재단하며 혐오의 선을 넘나든다. 혐오는 ‘A이면 B고, B이면 C일 때 A이면 C다’라는 식의 과도한 일반화에서 시작한다. 이처럼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세 줄의 삼단논법은 논리적 무결성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 문제 제기를 거부한다. 예외는 없는지, 감정적인 의미 부여는 없었는지, 전제가 옳은 것인지를 따지는 과정은 무한히 연기된다. 혐오 프레임에 문제를 제기하면 오히려 비논리적인 사람으로 몰리기 일쑤다.

같은 맥락에서 세 줄 요약 증후군이 만연한 사회 속의 개인은 자신의 서사를 인정받지 못한다. 정체성에 대한 이해, 과정에 대한 인정 그리고 관용은 세 줄에 함축되기 어렵다. 『레 미제라블』을 읽은 독자들이 주인공 장 발장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수백 페이지에 걸쳐 지켜보며 이해했기 때문이 아닐까? 세 줄로 요약된 장 발장은 그저 빵을 훔쳐 옥살이를 하다 탈옥하고, 신분을 속여 시장직을 맡고 딸을 입양해 기르다 혁명에 엮이는, 그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는 인물일 뿐이다. 하지만 온전한 서사 속의 장 발장은 굶주린 조카를 위해 빵을 훔친 것이고 저지른 죄에 비해 가혹한 형벌을 받은 인물이다. 미리엘 신부를 만나 회개하고 시장으로서 시민의 생명을 구하며 용서와 정의도 실천했다. 이런 맥락이 모두 생략된 세 줄의 장 발장은 이해받지 못할 것이다. 효율적 사고와 세 줄 요약 증후군은 정의와 포용이 사고회로에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의 정의와 포용이 상실된 사회의 개인들은 불행하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효율적인 사고의 관성을 더욱 눌러 밟고 조금 돌아가더라도 비효율적으로 사고하려 노력해야 한다. 비포장된 생각의 길을 걸으며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을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여 보고 현상의 결과보다는 과정을 좇으며 의미를 부여하는 연습을 해보자. 그리고 우리 주변에 가득한 자극적인 것들로부터 조금씩 거리를 둬보자. 이렇게 하면 답을 찾아가는 속도는 느리더라도 불행한 사람이 가장 적은 방향으로 공동체의 답을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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