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의 대화 | 소설가 문지혁을 만나다

한국 문단에서 ‘등단’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힘은 엄청나다. 주요 일간지의 신춘문예나 권위 있는 문예지를 통해 등단했다는 이력 없이 문단에서 살아남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그 문단에서 살아남아 ‘미등단 작가’라는 수식어를 훈장처럼 생각하는 작가가 있다. 2010년 장편 『체이서』가 네이버 ‘오늘의 문학’으로 선정되고 수 권의 소설을 써오다, 무려 4쇄를 찍고 속편까지 출간된 『초급 한국어』로 독자의 사랑을 가득 받는 문지혁 작가다. 그의 글이 가진 힘은 무엇일까. 지난 11일(목), 그 힘은 자신이 지적받아 온 ‘애매함’ 그 자체에 있다고 말하는 문지혁 작가를 만났다.

 

애매함 속에서 찾는 진실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애매한 사람이었다. 작가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글과 관계없는 일반인도 아니었다. 지망생이라고 하기엔 너무 오래, 깊이 들어와 있었고, 작가라고 하기엔 등단도 수상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나 같은 사람을 뭐라 불러야 할까?

- 『중급 한국어』(2023)

‘등단’이라는 문단의 경계 주변에서 오랜 기간 방황했던 문지혁 작가는 “신춘문예에 낙방하기를 반복하며 소설 쓰기를 그만하겠다고 결심하기도 했다”라고 털어놨다. 경계 안에 들어가지 못한 문 작가를 향한 시선은 냉혹했다. 그는 “등단하지 못했기 때문에 소설을 썼어도 책을 낸 사람에 불과했을 뿐 ‘작가’라는 세계에 초대되지 못했다”라며 “나를 투영한 소설 속 ‘지혁’처럼 늘 애매하다는 평가를 들어왔고, 그런 평가가 때때로 콤플렉스로 작용했다”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경계가 장벽으로 작용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문 작가는 경계에서 서성이지 않고 그 경계를 허무는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그는 “유튜브, 강의, 인터뷰 등 지금 하는 모든 활동이 나의 글쓰기와 연결돼 있고,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작가로서의 정체성이다”라며 “골방에 갇혀 홀로 신선놀음하기보다 문학적 경험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는 작가이고 싶다”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문 작가는 그의 유튜브 채널에서 매달 선정한 한 권의 책을 가지고 독자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북토크를 다니는 일상 영상을 공유하는 등 작가로서는 독보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 도시에 진정으로 남아 있는 색은 회색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흑과 백의 사이. 중간색. 나는 그게 싫지 않았다. 애매하게 걸쳐 있는 것들은 언제나 내 마음을 끌었다. 흰색처럼 무언가를 채워야 하지도, 검은색처럼 모든 것을 지워버리지도 않는 색. 그 색은 무의미를 용인해줄 것만 같은 색이었다.

- 『비블리온』(2018)

문지혁 작가는 문단에서 배제됐던 경험을 바탕으로 오히려 자신의 애매한 정체성을 온전히 수용할 수 있었고, 삶의 진실 또한 회색지대에 존재한다는 깨달음을 얻게 됐다. 그는 “우리가 늘 명확해질 것을 요구받지만, 세상의 진실은 명확하지 않은 애매함 속에 있다”라며 “애매하다는 내 결함이 세상의 진실을 담는 문학을 통해 오히려 장점으로 승화될 수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벗어나고 싶었던 경계, 언어로 가다듬다

소설에 고스란히 담긴 ‘애매함’이라는 문지혁 작가의 독특한 개성은 그가 살아온 삶 자체였다. 문 작가는 “대학 시절 전공이었던 영문학을 발판 삼아 이민 작가가 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미국으로 떠났지만, 먼 타지까지 와서도 경계 바깥에서 떠돌았다”라고 전했다. 그는 “내가 살았던 방은 작은 사다리꼴 모양에 쥐까지 살았고 월세는 몇천 불이었다”라며 “강 건너 뉴욕의 중심부, 맨해튼에 원하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그곳에 닿을 수 없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한국에서는 문단의 경계인이었던 문지혁 작가는 미국에서는 강을 사이에 두고 인종과 언어 등 모든 측면에서 ‘진짜 경계인’의 삶을 겪어야 했다.

우리 대부분이 1퍼센트에 들지 못한다는 것은 자명하지만, 저 시위대에도 함부로 끼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은 뭘까? 제3세계, 파 이스트 아시아에서 온 (구)유학생 (현)외국인 노동자, 강사 신분증에 적힌 것처럼 ‘논 레지던트 에일리언(non-resident alien)’인 나는?

- 『초급 한국어』(2020)

문지혁 작가는 한국 문단에서 느꼈던 작가로서의 애매한 정체성과 미국에서 느껴야 했던 비정규직 외국인 노동자로서의 경계적 정체성을 자전 소설 『초급 한국어』와 그 속편 『중급 한국어』에 오롯이 녹여냈다. 일명 ‘한국어 시리즈’로 불리는 두 소설은 주인공의 이름마저 ‘문지혁’이다. 소설 속 ‘지혁’은 미국에서 외국인으로 일하기 위해 자격과 신분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했고, 한국으로 돌아와 등단하지 않은 채 책을 내려다가 지인에게 그저 ‘책 낸 사람’이 될까 걱정된다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이처럼 소설 곳곳에 문 작가가 겪어 온 삶과 정체성이 묻어난다.

자신의 삶을 소설로 써낸 이유는 문지혁 작가가 한때 느꼈던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삶 자체를 언어로 의미화하겠다는 의지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의 내면을 언어로 이뤄진 우주에 빗댄 그는 “언어로 이뤄진 우주는 가만히 두면 왜소해진다”라며 “이를 넓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언어의 확장에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때 그는 언어를 확장하는 방식으로 글쓰기를 택했다. 문 작가는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 글을 쓰며 삶을 재구성했다”라며 “내 삶은 실패했다고 생각했었지만, 지나고 보니 원치 않았던 곳에서 원하는 것을, 원했던 곳에서 원치 않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는 반복되는 일상과 경계로 인한 좌절을 겪더라도 많은 사람이 글을 읽고 삶에 관해 글을 쓸 것을 당부했다.

 

사회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재난을 애도하다

문지혁 작가는 개인적 삶을 넘어 자신의 경계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사회의 이야기를 소설에 들여온다. 문 작가는 국경을 넘나드는 디아스포라 문학, 국경을 무너뜨리는 재난 이야기를 써왔다. 단편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에는 미국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일본인 ‘아야’가 등장해 동일본 대지진과 9·11테러가 발생했을 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곱씹는다. 그는 “경계에 선, 혹은 경계를 넘어서는 사람들에 대한 소설을 써 왔다”라며 “한 사람이 어떤 경계에 있는지가 그의 정체성을 드러내듯, 사회에 존재하는 경계와 그로 인한 균열이 그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준다”라고 밝혔다.

사회적 재난을 다룬 문 작가의 소설에서는 그 재난을 어떻게 애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태도가 드러난다. 그는 단편소설 「다이버」의 창작노트에서 이야기의 절반이 동일본 대지진과 세월호 참사에서 왔다고 밝히며 “그들을 차가운 물 속에서 구해낼 수 없다면, 소설가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를 닮은 인물을 그 안으로 들여보내는 것뿐이었다”라고 적었다.

입수 지점에 이르렀을 때 그는 잠시 망설였다. 며칠 전까지 한동안 잊고 있었던 물에 대한 두려움이 다시 살아나서였다. … (중략) … 딴생각을 하던 기장이 룸미러로 머뭇거리는 그를 발견하고 무슨 일이냐고 묻기 직전에 그는 크래프트 왼쪽 출구에서 바다로 뛰어들었다.

- 『다이버』(2018)

오 교수는 호수 쪽으로 난 창 앞에 서서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 (중략) … 사람이 들어왔는데 인사는커녕 뒤조차 돌아보지 않는 무례에 화가 좀 났다. 도대체가 성공한 사람들 중에는 제대로 된 인간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이, 갑자기 그가 뭔가를 손에 쥐더니 창밖으로 힘껏 던졌다.

- 『폭수』(2018)

문지혁 작가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방식대로 균열과 재난을 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다이버」의 주인공은 물에 대한 공포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찾기 위해 마지막까지 물속에 들어가고 「폭수」의 오 교수는 아들이 빠진 호수의 물이 폭발하기를 기다리며 매일 동전을 던진다. 문 작가는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애도 방식을 보이지만, 공통점은 끊임없이 행동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우리나라는 비극이 일어났을 때 다 같이 슬퍼하지만, 상대적으로 금방 잊는 것 같다”라며 “재난과 재난 이후의 삶을 기록으로 남겨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작가가 해야 할 사회적 책무라고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우리의 삶 전체를 거대한 애도 기간이라고 본 문 작가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우리는 애도의 주체이자 대상”이라며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사람, 우리가 살고 있을 때 죽은 사람을 애도하다가 마침내 우리 자신도 애도의 대상이 되고 만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렇기에 오래도록 지속되는 애도가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문 작가는 무의미해 보일지라도 그가 매일 문장을 쓰는 것이 「폭수」 속 오 교수가 매일 호수에 동전을 던지는 것처럼 지속적으로 애도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그는 “나에게는 소설 자체가 애도의 한 형태다”라며 “항상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나아가야 했던 삶을 어느 순간 받아들이기로 하고, 미련할지라도 묵묵히 삶을 써 내려갈 것이다”라고 다짐했다.

인터뷰 말미에 문지혁 작가는 “느리지만, 천천히 무언가가 돼가는 것 같다”라며 “애매한 나의 삶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문 작가는 애매한 경계에 서 있는 자기 자신에게서 힘을 발견해 냈다. 그리고 그는 이제 그 경계에 우뚝 서서 경계를 넘나드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 삶의 경계는 물론, 사회의 경계와 그 균열을 들여다보고 이를 찬찬히, 오래 위로해 주는 그의 소설이 계속되길 기원한다.

 

 

사진: 유예은 기자 

eliza721@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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