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에 발행된 『대학신문』은 봄 축제와 체육대회 소식으로 활기찼다. 이에 더해 인구 소멸을 겪는 지방 도시의 차가운 소식으로 온도의 균형을 맞춘 듯하다. 성소수자 무지개 행진과 두레미담 노동자 관련 기사는 『대학신문』의 정체성을 잘 드러냈다. 또한 안전한 캠퍼스를 화두로 잡은 연재는 한 페이지를 할애한 만큼 조사의 노력이 엿보였다. ‘노동3권 잔혹사’ 연재는 산업화 시대의 노동권 역사를 정리하는 것에 방점을 둔 느낌인데, 긱노동자* 및 로봇세 논의 등 급변하는 노동 시장에 따른 문제도 다뤘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6천여 명의 거주 시설인 관악학생생활관에서 근무하다 보니 쓰레기 분리배출 문제를 언급한 짧은 기사들이 노동 환경 기사와 연결돼 눈에 들어왔다. 이번 봄 축제 때 다회용기 이용 행사가 진행돼 학생들이 뿌듯함을 느꼈다는 기사와 배달 음식의 뒤처리가 편한 캠퍼스 환경을 요구하는 학부생 칼럼이 보였다. 한때 일회용품이 제공하는 위생과 편의는 선진적인 것으로 여겨졌지만, 요즘은 모든 세대가 일회용품 사용에 죄책감을 느끼는 시대가 된 듯하다. 산업이 가장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도 기후 행동 실천을 낯설어하지 않는 학생들의 모습이 반갑다.

한 가닥 노파심은 학생들이 환경 문제를 ‘학교는 서비스의 제공자, 학생은 그 대상자’라는 프레임 안에서 인식할까 하는 것이다. 생활관에서 인문·사회학적 지식이 룸메이트와의 갈등을 해결하는 통찰로 이어지기 힘들듯, 학생들이 기후 위기와 노동권 개념을 인식하더라도 일상의 귀찮음을 이겨내고 제대로 쓰레기를 처리하지 않을 수 있다. 결국 분류가 제대로 안 된 쓰레기를 다시 정리하고 스티로폼과 종이 박스의 테이프를 제거하는 것은 생활관 청소 노동자의 몫이다. 재활용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페트병의 라벨이 제거돼야 하는데 청소 노동자가 그렇게까지 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학생들이 라벨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 페트병은 그대로 재활용 쓰레기 업체로 넘겨져 실질적인 재활용률은 현저히 낮아진다.

물론 재활용률을 높이기 위해 편리한 분리배출 환경을 조성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 하지만 소비자나 서비스 대상자로서가 아닌 지구인으로서의 환경 의식 제고가 동반돼야 한다. 이제는 자신의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배달 음식과 포장재를 줄이는 일상을 선택하는 단계로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긱노동자: 고용주의 필요에 따라 임시로 계약을 맺은 후 일회성 업무를 맡는 초단기 근로자.

 

윤유선 행정실장

관악학생생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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