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우(사회학과 석사과정)
조민우(사회학과 석사과정)

유난히 피곤한 날이었다. 애매한 수업 시간 때문에 밥을 걸렀다. 수입이 적으니 배달 음식도 꺼려진다. ‘가만. 내가 왜 이러고 살아야 하지?’ 이런 생각을 풀어놓고 있었다. 그러자 답이 돌아왔다. “누가 대학원 가라고 등 떠밀진 않았어.”

기분은 나빴으나 딱히 할 말은 없었다. 나를 4년간 가르친 교수님조차도 대학원 가지 말고 다른 길을 찾아보라고 했었다. 가족들도 딱히 반기지 않았고, 친구들도 응원 반 걱정 반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내 발로 대학원에 왔으니 어디다 하소연할 자격도 없었다. 얼마 전까지 유행하던 말로 ‘누칼협’, 그러니까 ‘누가 칼 들고 협박’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말은 우리 모두 살면서 수도 없이 듣고는 한다. 어떨 때는 맞는 말이니 수긍한다. 그러나 가끔은 가당치도 않은 상황에서 저 말을 듣게 된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카투사로 입대 후 훈련소에서 교육대장이 우리 모두를 앉혀두고 물었다. “여기서 끌려온 사람 있나? 아무도 없잖아? 맘에 안 들면 나가. 너네 말고도 하고 싶다는 애들 많아.” 아무렴 카투사는 영어시험까지 보고 지원해서 들어갔으니 결코 누군가 칼 들고 협박하지 않았다. 

선택이란 무엇일까? 이럴 때는 질문을 바꿔보면 도움이 된다. 우리는 선택을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선택은 ‘내가 내린 결정’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누군가의 강압이 없다면 내가 선택한 것이고, 그러니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앞선 전제, 그러니까 ‘누군가의 강압’이라는 것이 늘 그렇게 가시적이고 노골적인 것은 아니다. 사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칼로 협박당하는 듯한 수준의 강압은 우리 도처에 있다. 꼭 누군가가 내게 칼을 들어야만 강압인가?

공부를 하려는 사람이 대학원에 가지 않으면 어디로 가야할까? 군대에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카투사 말고 어디를 가야 할까? 대학원과 카투사 말고 별다른 선지를 고를 수 없었다. 선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굳이 학교를 옮겨가며 대학원에 왔고 굳이 시험을 보며 카투사에 지원했다. 이것은 ‘합리적 선택’이었나?

사이먼은 무한한 합리성은 허구며, 필히 제약되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제한된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선택이라는 행위는 모든 선지를 펼쳐놓고 계산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애초에 주어진 선지 자체는 매우 제한돼 있다. 특히 계산하는 행위조차도 제한적이다. 우리 바깥의 문화, 규범, 가치와 우리 안의 경험과 본성이 복잡하게 맞물려 하나의 경로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센이 말하는 것처럼 무언가를 ‘선호’할 수 없다. 그보다는 ‘초선호’하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를 묻지 않고 ‘우리는 무엇을 원해야 하는가?’를 묻는다는 것이다.

꼭 누군가가 칼 들고 협박하지 않아도, 우리는 늘 살벌한 협박 속에서 선택하며 살고 있다. 주어진 선지는 사람마다 다르고, 사회마다 다르고, 시대별로 다르다. 개인에게 전적인 선택의 책임을 지우는 ‘누칼협’이라는 말이 등장했을 때 든 섬뜩함은 비단 나만 느낀 것이 아닐 것이다. 

한 사람의 선택은 그 사람만의 합리성의 결과가 아니라 그 사람을 둘러싼 관계, 사회, 구조의 산물이다. 정말로 누군가 칼을 들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 근처에는 늘 비가시적인 압박과 제약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같은 조건에서도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같은 조건이 개인에게 전달될 때 통과돼야 하는 두터운 ‘프리즘’은 결코 한 개인이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누칼협’을 묻기 전에 타인이 처한 상황과 환경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타인에게 선택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그와 내가 같은 사회에 살고 있다면 말이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