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문을 나서며 | 졸업을 맞은 학생들의 이야기

장원석(국어국문학과 석사 졸업)
장원석(국어국문학과 석사 졸업)

‘책을 좋아한다’라고 말하면 대학원생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찾는 일이 더 어려울 듯합니다. 오히려 아직도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그만큼 치열하게 책을 보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또는 그런 호오의 감정을 넘은 경지에 한참 미달하는 게 아닌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럼에도 저를 대학원 석사 과정에까지 데려다 준 건 이렇듯 말로 표현하면 유난스럽게만 보일 책 애호의 감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저에게는 중앙도서관이 기억에 남습니다. 중앙도서관에서 출판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책들을 뒤적거려 봐도 좋고, 고문헌자료실이 더 어울릴 것처럼 종이는 누렇게 변색하고 책등은 너덜너덜해진 책들을 몇 권씩 열람실 책상에 쌓아놓고 보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늘 변수는 있는 법이겠습니다. 예컨대, 누군가가 제가 읽고자 하는 책 A를 이미 대출해 간 경우, 그리고 반납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을 때 학부생이었던 저는 낙담하고 단념했었지만 대학원생이 된 저는 다릅니다. 그 결정적 차이는, 책에 대한 오기에 있겠습니다. 비교적 가까운 법학도서관이 그 책을 소장 중이라면 드넓고 경사진 캠퍼스를 누비기를 썩 좋아하지 않는 저에게는 너무도 기쁜 일일 것이지만, 사회과학도서관이나 농학도서관 정도라도 마음을 굳게 먹고 길을 나서볼 수 있습니다. 해동학술정보실이라면 고민이 필요하겠지만 여정을 떠나볼 것입니다.

그러나 움직이기 싫은 대학원생인 저는 대개 도서관 홈페이지에 접속해 가까운 대학의 도서관에서 A의 상호대차를 신청합니다. 물리적으로 가까운 대학의 도서관이라고 해서 빨리 오는 것은 아니겠지만 왠지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렇게 느긋하게 A가 배송되기를 기다리는 태도도 바쁜 현대사회에 필요한 미덕이겠지만, 인내심이 적은 저는 정보검색실에 자리를 잡고 국립중앙도서관이나 국회도서관에서 디지털화된 자료를 제공해 주는지도 동시에 검색해 봅니다. 그곳에서 A의 원문 DB를 제공해 준다면 저는 기쁜 마음으로 출력해 볼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실물로 제 앞에 당도한 책은 괴물처럼 느껴집니다. 책은 그 육체와 영혼에 있어서 모두 괴물처럼 느껴지는데, 다음과 같은 까닭입니다. 책의 육체가 괴물인 까닭은 그 무게 때문입니다. 책은 왜 이리 무거운 것일까요? 양장본은 그야말로 괴물의 칭호에 걸맞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양장본들을 가방에 욱여넣었다가 가방이 찢어진 적이 있습니다. 반양장이라면, 미국에서 물 건너 왔다면 그 책은 환영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책일수록 더 조심해야 합니다. 책의 영혼은 더 교묘한 괴물이기 때문입니다. 책의 영혼은 정말로 파괴적일 때가 있습니다. 내용이 이해되지 않는 책은 시간을 무지하게 잡아 먹습니다. 활자 하나하나에 시간이 촘촘히 걸려들기 때문입니다. 책이 건네는 말의 내용이 증발하고 오로지 활자만이 저에게 건너올 때면 저는 늘 제 무능력과 마주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반복했던 듯합니다. 쉽사리 활자 건너편에 있을 어떤 인격체를 상상하더라도, 책이 저에게 주는 것은 인격체인 척 위장하는 활자의 무더기고 나름대로 한 명의 사람임을 자신하는 저는 그런 활자 무더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는 것만큼이나 사람이 사람 아닌 것과 마주하는 일이 무섭다는 걸 이해하게 된 건 그 과정에 따라온 아주 소박한 소득입니다.

괴물은 이중성을 갖는다고 하는데, 책을 얻기까지의 과정에 있는 안온함이 결국 괴물 같은 책의 모습과 마주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걸 보면 퍽 맞는 말 같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런 책의 마수에 걸려서 교정을 나서려다가도 결국에는 그러지 못하고 학교에 남게 됐습니다. 이왕 남게 된 것, 책의 충실한 꼭두각시 노릇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수에 걸리는 대신 책의 충성스러운 오른팔이 되는 게 처세술에 더 부합하지 않을까요. 교정을 나서는 분들의 앞날은 당연히 응원받아 마땅하지만, 혹 저 같은 이유로 교정을 나섰다 붙잡혀 돌아온 분들이 계신다면 같이 힘내자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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