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 교수(정치외교학부)
김영민 교수(정치외교학부)

아직 소설가가 되기 전인 1978년 4월 쾌청한 오후. 무라카미 하루키는 야쿠르트 스왈로즈를 응원하기 위해 도쿄 진구 구장에 갔다. 야쿠르트 스왈로즈는 당시 비인기 구단이었기에, 텅 빈 외야 관중석에 드러누워 홈 개막전을 관람했다. 드디어 게임이 시작됐다.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1번 타자가 초구를 후려쳐 좌중간에 2루타를 만들어냈다. 바로 그 순간 하루키는 자신의 일생을 바꿀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가가 돼야겠다! 바로 여기에 대학의 이상적인 모습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무엇이 이상적인 모습인가? 안정된 직장을 얻기 위해 학생이 쉬운 수업을 골라 듣는 대학, 잘릴 위험이 없는 교수가 열의 없이 수업하는 대학, 정기 감사에서 문제가 적발되지 않으려 전전긍긍하는 대학, 만성적인 예산 부족에 시달리는 대학, 근거 없는 순위매기기에 연연하는 대학, 되도록 천천히 망하는 데 관심이 있는 대학… 이런 모습은 불가피할 수는 있어도 이상적인 모습은 아니다.

그래서일까 누구나 대학의 개혁을 말한다. 특히 총장 선출 시즌이 되면, 많은 이들이 소리 높여 대학의 앞날에 대해 논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약속한다. 이제 새로운 보직교수가 임명되고, 희망찬 발전방안이 또 작성되겠지. 그러나 발전방안에 의한 의도적인 계획 혹은 ‘엔지니어링’을 통해 이 사회에 멋진 인재들이 넘치게 될까? 그렇게 믿기에는 실망스러운 일들을 이미 너무 많이 보고 들었다.

그래서 믿지 않는다. 반복되는 개혁의 언어에 피로감을 느낄수록, 기득권을 유지한 채 큰 갈등 없이 변화를 이뤄내리라는 희망은 점차 사라져간다. 몇 달 전 타계한 미국의 작가 코맥 매카시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어떤 식으로든 인류를 개선할 수 있고, 모두가 다 조화롭게 잘 살 수 있다는 발상은 너무 위험한 생각이에요.” 대학의 모습은 이제 매카시가 말한 인류의 모습과 닮아 간다.

그럼에도 나 역시 대학의 변화를 바란다. 그 변화는, 학생이 직장 찾는 일을 넘어 자기 존재를 변화시켜 보겠다는 포부를 가질 때 생겨날 것이다. 선생이 수업 시수를 채우는 일을 넘어 학생과 자신을 함께 변화시켜 보겠다는 야심을 품을 때 생겨날 것이다. 깨달음을 통한 인간의 변화란 얼마나 원대하고 낭만적인 이상이랴. 실로 이런 이상을 통해 교육과 학문이 구상됐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시절은 갔다. 

그 누구도 깨달음을 ‘엔지니어링’ 할 수 없다. 그것은 어느 순간 온다. 그래서 나는 야구장을 상상한다. 어느 9월 쾌청한 오후. 한 학생이 대학이라는 이름의 야구장에 들어서는 거다. 비인기 분야라서 텅 빈 외야 강의실에 앉아 개강전을 관람하는 거다. 드디어 강의가 시작됐다. 강의가 시작되자마자, 담당 교수는 초구를 후려쳐 좌중간에 2루타를 만들어낸다. 바로 그 순간 그 학생은 자신의 일생을 바꿀 생각을 하게 된다. 자유인이 돼야겠다!

이런 변화는 누군가의 조작이나 계획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하루키가 ‘그래, 나도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라고 했듯이, 그 학생은 ‘그래, 나도 자유를 누릴 수 있을지 모른다’라고 중얼거린 것이다. 야무진 그는 그 자유를 제대로 누리기 위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를 탐색하고 준비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런 변화는 장기발전방안에 의한 엔지니어링의 결과가 아니라 학생 자신의 결단이다. 변화를 가져온 것은 선생이 아니라 바로 학생 자신이다.

아니 학생 자신이 변화의 주인이라고? 그럼 교수는? 직원은? 총장은? 교육부는? 나머지 사람은 할 일이 없다는 말인가? 왜 할 일이 없겠는가. 대학이라는 야구장이 있으려면 야구선수가 있어야 하고, 코치진이 있어야 하고, 스태프가 있어야 하고, 치어리더가 있어야 하고, 관중이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 각자 야구를 열심히 하는 거다. 딱 소리와 함께 흰 공이 공중을 날고, 누군가 그 공을 보며 결심하는 거다. 한 번뿐인 인생, 뭔가 흥미로운 일을 해보겠다고, 자유를 느껴보겠다고. 담당 선생이 타자로 나와 날카로운 2루타, 아니 파울볼을 날린 그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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