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이윤옥 문학평론가가 본 이청준

이윤옥 문학평론가
이윤옥 문학평론가

올해는 한국 현대 문학계의 거장 이청준 작가의 15주기다. 생애 내내 넓은 스펙트럼의 작품 활동과 다채로운 창작 방식을 유지한 이청준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변함없는 울림을 준다. 『이청준 평전』을 집필한 이윤옥 문학평론가는 그의 문학사를 관통하는 열쇠말 중 하나가 ‘부끄러움’이라고 설명하면서, 이것이 지금 이 순간을 사는 우리에게 갖는 함의를 풀어낸다.

 

소설가 이청준이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15년이 지났다. 그는 한국문학의 ‘뜨거운 상징’, 큰 나무, 큰 산으로 불리며 더 나아가 자신의 작품으로 산맥을 이룬 작가로 여겨진다. 그 평가에 걸맞게 이청준은 생전에 ‘나만의 문학사를 갖고 싶다’라는 소망을 밝혔다. 그의 모든 작품을 살피는 문학사는 매우 방대한 작업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하나의 ‘주제’와 그 변주를 통해, 그 주제가 어떻게 그의 문학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했는지, 그가 그 주제에 왜 몰입했는지 보겠다. 물론 이 주제는 지금 우리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광장 — 가면

이청준은 1994년 수필집 『사라진 밀실을 찾아서』를 펴냈다. 그 속에 실린 같은 제목의 글은 오늘, 여기, 이곳에 사는 ‘우리’라는 운명 공동체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청준이 생각하기에 우리는 밀실이 사라진 사회 속에 살고 있다. 밀실이 사라진 시대에 남는 것은 당연히 광장의 삶뿐이다. 그렇다면 밀실은 무엇이고 광장은 무엇일까? 밀실은 혼자의 공간이고 광장은 다수의 공간이다. 광장을 지배하는 것은 각종 정보의 무차별적인 간섭과 빠른 유통, 그로 인한 개인의 익명화와 몰개성화다. 이청준은 광장만 남은 사회를 삭막하고 획일적인 통제사회에 가깝다고 여겼다.

빠른 정보와 대량 유통 기능의 공유 속에서 항상 드넓은 거리의 삶에만 섞여 살아야 할 것인가. 그래서 누구나 같은 의상과 같은 몸짓, 표정들로 비슷비슷한 세상살이를 해 가야 할 것인가. 누구나 같은 목소리의 말을 즐겨하고 같은 율조의 노래를 좋아하고, 농담도 비슷하고, 웃음도 비슷하고, 생각이나 느낌도 다 비슷비슷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

- 「사라진 밀실을 찾아서」

광장에서 사람들은 반드시 타인과 함께해야 하는데, 그 삶이 보여주는 가장 큰 특징은 ‘가면 쓰기’다. 우리는 가면을 쓰는 순간 특정한 개인을 벗어나 익명의 다른 사람이 된다. 사이버공간을 생각해 보자. 현실이 아닌 가상공간에서, 실명이 아니라 마음대로 선택한 ID로 행동할 때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모두 익명의 고삐 풀린 자유, 편안함, 방종, 무책임에 대해 잘 안다. 사람들은 실명이었다면 결코 할 수 없었을 말과 행동을 종종 익명으로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이 잃은 ‘부끄러움’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곧 알게 될 것이다. 

가면에는 마스크와 제복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수필 「제복에 대하여」(1978)의 부제는 ‘집단인격시대에 즈음하여’다. 그 글에 따르면 제복을 입은 사람은 무의식중에 자신을 자신이 아니라고 여기게 된다. 제복의 가장 큰 힘은 그것이 개인의 소멸에 기여한다는 점이다. 나를 다른 사람과 같게 만드는 제복은 당연히 유형화된 사고를 낳고 ‘집단인격시대’를 연다. 여기서 제복을 가면으로 바꿔도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청준의 소설에서 가면은 초기에서 후기로 가면서 점차 강화되는데, 그 정점에 ‘분신’이 있다. 「병신과 머저리」(1966), 「꽃과 소리」(1969), 「가학성 훈련」(1970), 「가면의 꿈」(1972), 「예언자」(1977) 등의 주인공들은 모두 진짜 가면이나 일종의 가면을 쓰고 살며, 「가수(假睡)」(1969), 「치자꽃 향기」(1976), 「아우 쌍둥이 철만 씨」(1994) 등의 인물들은 분신을 만든다. 이청준은 몰랐지만 요즘 젊은이들에게 유행하는 저 희한한 ‘부캐’도 분신이라 할 수 있다. 그뿐인가. 가상공간에 존재하는 수많은 디지털 아바타에 이르면, 이제 우리는 분신들에 둘러싸여 어느 것이 진짜 ‘나’인지 헛갈릴 지경이다.

가면과 분신에 대한 이야기는 진짜와 가짜에 대한 이야기다. 이청준의 소설에는 진짜와 가짜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앞서 본 소설들 이외에도 「더러운 강」(1967), 「그림자」(1970), 「미친 사과나무」(1971), 「엑스트라」(1973) 등 작품에 따라 진짜와 가짜는 맨얼굴과 가면, 실명과 가명, 생화와 조화, 나와 분신으로 변주된다. 가면을 쓰면 처음에는 진짜 얼굴과 가짜 얼굴이 공존하지만, 하나가 드러날 때 다른 하나는 숨는다. 가면을 쓰고 편안함과 행복감을 얻는다 해도 그것은 모두 가짜다. 우리는 거짓 행복과 위안을 얻으면 얻을수록 가면을 사랑하고 진짜 얼굴을 잊으려 한다. 가면을 오래 쓰면 쓸수록 맨얼굴은 사라지고 마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의 본모습을 잃고 사는 것이다. 이청준의 등단작 「퇴원」(1965)은 이처럼 자신의 본모습을 잃고 사는 자아상실 상태에서 자아회복으로 가는 길, 한마디로 자기 얼굴 찾기를 모색하는 소설이다.

우리가 자신의 맨얼굴을 가리는 가면을 쓰면서 가장 먼저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부끄러움’이다. ‘부끄러움’은 이청준의 문학을 가로지르는 열쇠말이다. 우화소설 「치질과 자존심」(1980)을 보면 그가 말하는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치질 전문의와 치질을 앓는 언어학자가 주인공인 이 소설의 핵심이 다름 아닌 부끄러움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사람값에 대해 질문하는 「치질과 자존심」은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라는 선언이기도 하다. 사람은 부끄러움에 대한 자각과 부끄러움의 내재화가 가능할 때 비로소 사람일 수 있다. 자기를 높이는 마음인 자존심은 부끄러움에 대한 인식의 다른 이름이다. 치질을 박멸하기 위해 사지 보행을 주장하는 의사에게 맞서, 언어학자는 그의 치료를 결단코 거부한다. 사람은 두 다리로 서서 직립보행을 해야지 사람이다. 부끄러움을 잃은 채 사지 보행을 하는 사람은 이미 사람이 아니다. 부끄러움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매우 중요한 덕목일 뿐 아니라 이청준에게는 삶의 원죄성, 사는 것 자체와 관련이 있다. 그것은 집안의 우환이나 신상에 생긴 불상사의 원인을 밖에서 찾기에 앞서 자신의 부덕 탓으로 돌리려는 의식이다. ‘내 탓이요’는 크고 작은 재난과 불운의 원인을 따지기보다 자신의 허물을 먼저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모든 이의 ‘내 탓’은 곧 모든 이의 ‘네 탓’이며 공동체 전체의 탓으로 이어져, 사회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혁시킬 수 있다. 이청준은 「부끄러움 견디기의 소설질」이나 「빼앗긴 부끄러움」 같은 글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끄러움에 대해 반복해 말한다.

 

밀실 — 맨얼굴

가면에 빼앗긴 부끄러움 찾기는 참자아인 맨얼굴 찾기와 동의어다. 그러니 부끄러움 찾기는 가면 벗기에서 시작돼야 하는데, 거기에 필요한 것이 밀실이다. 이청준의 소설에서 밀실은 가면이 그랬듯 초기에서 후기로 가면서 강화되고 질적으로 변모한다. 첫 소설 「퇴원」이 그린 어머니 자궁 같은 따뜻한 밀실은 만년의 장편소설 『신화를 삼킨 섬』(2003)에서 아기 장수 설화 속 밀실로 나아간다. 아기 장수의 밀실은 자기 성찰과 인내라는 치열한 담금질을 통해 재탄생을 가능하게 만드는 곳이다.

그 밀실은 이미 저 유년시절과 같은 아늑한 꿈의 보금자리가 아니다. 꽃빛이 아름답고 새소리가 낭랑한 휴식처, 안식지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이제 오히려 끊임없는 자기변혁과 거듭나기를 향한 삶의 혹독스런 담금질이 행해져야 하는 곳이다. 용맹정진 중인 선승의 토굴 도량과도 같은 참담스런 자기성찰과 인내의 괴로운 고문실인 것이다.

- 「사라진 밀실을 찾아서」

우리가 밀실에서 맨얼굴을 마주하려면 얼굴을 비출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하다. 가장 보편적이며 상징적인 반영의 도구는 거울이다. 거울 보기는 내가 나를 보는 것이다. 거울 속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가 있다. ‘나’는 누구인가? 거울을 들고 자신의 진짜 얼굴을 응시하는 사람은 성찰하고 반성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의 과오를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는 사람이다. 거울 중에서 가장 의미심장하고 깊은 거울이 마음(양심)의 거울이다. 스스로를 마음에 비춰봤을 때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사람이 있을까?

거울은 「퇴원」과 『조율사』(1972)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기능한다. 「퇴원」에서 간호사 미스 윤은 주인공 ‘준’을 ‘자아망실증 환자’로 부르며, 치료의 도구로 거울을 준다. 『조율사』에서도 ‘지훈’ 은 점점 미쳐가면서 열심히 거울을 본다.

선생님은 아마 적적하실 때, 거울을들여다보신 적이 없으신가 봐요. 거울을 들여다보노라면 잃어진 자기가망각 속에서 살아날 때가 있거든요.”

(…)

나는 당장 눈앞에서 미스 윤을 쫓기위하여 그녀가 침상 끝에 놓고 간 거울을 집어들었다. 거울 속에서 나는참으로 오랜만에 나의 얼굴을 보았다.

- 「퇴원」

참으로 오랜만에 자기 얼굴을 본 ‘준’은 자아를 잃고 살았다는 자각에 이르며, 이후 병원을 나와 다시 광장으로 향한다. 광장에서 우리는 타인과 적당한 거리 두기 따위를 위해 어느 정도 가면을 쓸 수밖에 없다. 밀실이 존재하던 시기에 그것은 당연하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그때 우리는 광장에서 밀실로 돌아와 하루를 돌아보고 반성하고 쇄신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광장으로 나온 1965년의 ‘준’에게도 언제든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밀실인 병원과 미스 윤이 있었다. 밀실이나 광장만 남은 삶은 온전한 삶이 아니다. 가장 이상적인 삶은 밀실에서 광장으로 다시 밀실로 순환되는 구조에서 얻을 수 있다. 그 순환 속에서 우리는 하루, 한 달, 한 해 동안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부끄러움과 함께 자긍심도 되찾아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문제는 지금 우리 처지가 30년 전 『사라진 밀실을 찾아서』가 쓰였을 때보다 훨씬 더 나빠졌다는 점이다. 우리는 사라진 밀실을 찾기는커녕 점점 확장되는 광장을 마주하고 있다. 광장이 지배하는 현실은 어디까지인가? 컴퓨터와 휴대전화를 껐다고 그 속의 세계가 사라졌을까? 어째서 사회와 단절한 채 폐쇄된 자기만의 방에서 사는 사람들조차 온전한 밀실을 갖지 못하는 걸까?

우리는 모두 지난 팬데믹 시대에 마스크가 감염을 차단함과 함께 어떤 기능을 하는지 경험했다. 하루 종일 얼굴을 가리던 마스크를 벗은 얼굴을 마주했을 때의 낯섦은, 마스크가 점점 얼굴이 돼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을 찾으려는 목적이 부끄러움 자체만 지향해서는 안 된다. 부끄러움과 돌아봄은 짝을 이루는 개념이다. 찰나의 부끄러움에도 돌아봄은 선행한다. 우리는 부끄러움을 통해 스스로를 반성하고 새롭게 태어나고 싶다. 돌아봄이 없는 삶은, 그래서 앞으로 내달리기만 하는 삶은 광장만 있는 삶과 같다. 이제 우리가 맨얼굴을 되찾을 수 있는 공간인 밀실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 마치 사라진 유토피아를 찾듯,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이제 스스로 재탄생할 수 있는 밀실을 어떻게든 각자 만들 수밖에 없다. 물리적인 밀실만 밀실이 아니다. 사라진 밀실을 찾는 매우 유용한 방법 중 하나가 이청준의 소설을 읽는 것이다. 좋은 소설은 읽는 이를 반성하게 만든다.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아니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좋은 소설은 우리를 비춰 볼 수 있는, 그래서 우리의 맨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드는 맑고 깨끗한 거울이다. 지금 우리가 이청준의 소설을 다시 손에 들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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