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서(종교학과·19)
유영서(종교학과·19)

고등학생 시절부터 기억 한 켠에 깊게 남아 있는 영어단어가 있다. 바로 ‘aspiration’이다. 숨을 삼키고 뱉는 ‘호흡’, 간절히 바라는 마음인 ‘염원’,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지닌 독특한 단어다. 그런데 호흡으로 염원을 전달하는, 위 두 의미를 모두 합한 개념이 있다. 바로 ‘말’(言)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말은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목구멍을 통하여 조직적으로 나타내는 소리’를 뜻한다. 즉 목구멍을 통해 나오는 호흡과 화자의 의도, 이른바 염원이 있어야 한다. 이 중 하나라도 빠진다면 말은 말이 될 수 없다. 왕자에게 고백하고 싶지만 목소리를 빼앗긴 인어공주는 말의 수단을 잃은 사례다. 발음 기관은 생생하게 작동하지만 어떤 의도도 없는 잠꼬대는 말의 목적을 잃은 사례다. 이들은 모두 말이 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말은 음과 합쳐져 가사가 됐고, 문자 기호와 함께 글이 됐다. 후에는 픽셀 기호를 통해 사진이 되고 영상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인간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최고의 도구는 ‘말’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사태에서도 면접, 회의, 수업 등 집중을 요하는 상황에서는 전화나 문자 대신 화상 통화를 이용했다. 이처럼 우리는 중요한 상황일수록 얼굴을 보고, 눈을 맞추고, 듣고, 대답하는 과정을 필수로 여긴다. 말은 여전히 가장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사회적 도구다.

그러나 말은 한계를 지닌다. 첫째, 말은 듣는 이가 없으면 생명력을 잃는다. 벽에 대고 혼자 중얼거리는 말은 화자에게 깊은 절망감만 안겨줄 뿐이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 속, 무인도에 떨어진 주인공이 배구공에 말을 건네는 이유기도 하다. 둘째, 말은 돌이킬 수 없다. 한 번의 말실수로 공들였던 관계가 무너지기도 한다. 따라서 말은 무한한 신중함을 요구한다.

말의 한계에 부딪친 이들은 다른 매체를 찾는다. 여러 매체 중 으뜸은 온라인 속 글쓰기다. 접근성이 좋은 온라인 글쓰기는 익명성을 보장해 줄 뿐더러, 언제든지 수정할 수 있다. 게다가 반응을 얻어내기도 쉽다. 더 많은 반응을 갈망하는 이들은 보다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글을 거름망 없이 마음껏 배설(排泄)한다. 그것이 정말 나의 뜻인지, 혹은 내가 쓰고 있는 표현 방법이 정당한 것인지는 고민하지 않는다.

배설만 반복하던 이들은 ‘말하기’를 잊는다. 전하고자 하는 나의 뜻을 잊고, 생각을 정리해 차근차근 말하는 방법을 잊는다. 마녀 없이 스스로 목소리를 버린 인어공주다. 문제는 오프라인 세계, 현실에서 일어난다. 말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을 때, 말하기를 잊은 이들은 비명을 지른다. ‘내 말이 말 같지 않냐’라며 울부짖고 좌절감에 빠진다. 극단적인 경우, 제 무력감을 증폭시켜 불특정 다수에게 해를 가한다. 최근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이상동기 범죄’의 가해자 대다수가 오랫동안 홀로 칩거하던 청년들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자. 실제로 몇몇 전문가들은 이 새로운 유형의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방 안에 갇힌 이들을 사회로 꺼내는 복지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제도의 현실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수 있지만, 적어도 그 의도는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은 상대를 필요로 한다. 돌이킬 수도 없다. 이 같은 분명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말하고 듣는다. 오히려 그 한계가 우리를 세심하게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말로써 우리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공들여 설명할 수 있고, 상대를 정성 들여 이해할 수 있다. 덕분에 말은 가장 널리 쓰이는 사회적 도구로 자리 잡았다. 말하기는 나와 당신을 연결해 주고, 우리를 뭉치게 하고, 공동체를 다듬는 수단이다. 따라서 말하기를 잊은 이들에게 다시 한번 말 배움의 기회를 열어줄 필요가 있다. 

신형철 평론가는 저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인간이 더 인간다워지기 위해선 신이 필요할 수도 있다”라고 했는데, 나는 ‘신’ 대신 ‘말’을 그 자리에 놓고 싶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닐 테다. ‘신’은 ‘말씀’(logos)이기도 하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말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모두 인간으로 숨쉬기를 염원하니까. 더욱 인간다워지기 위해, 제대로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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