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 기초과학 지원정책의 한계와 개선방안

지난달 30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내년 연구개발(R&D) 예산을 올해 31.1조 원 대비 25.9조 원으로 16.6% 감축할 것을 발표하면서 과학계는 일대 충격에 휩싸였다. 정부가 33년 만에 처음으로 R&D 예산을 삭감한 것은‘R&D 카르텔’을 타파해 비효율적인 연구에 예산을 배분하지 않겠다는 목적에서였다. 그에 앞서 지난달 22일에는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회에서 매년 성과가 낮은 연구 20%에 대해 구조조정을 하겠다는 계획이 의결됐다. 일련의 정책의 기저에는 국가가 단기적으로 성과를 내는 연구를 효율적인 연구라 파악하는 시선이 전제돼 있다. 그렇기에, 장기적으로 진행되며 정량화하기 어려운 성과를 이뤄내는 기초과학 연구는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 놓였다. 이와 같은 위기 속 한국의 기초과학은 어떻게 그 한계를 넘고 날아오를 수 있을까.

 

삶의 기반이 되는 기초과학

‘기초연구진흥 및 기술개발지원에 관한 법률’(기초연구법)에 따르면 기초과학은 자연 현상의 탐구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지적 활동을 뜻한다. 기초과학을 정의하는 여러 방식이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의 근본적 원리, 즉 진리 그 자체를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이해되는 것이다. 가령 물리학에서 세상을 이루는 기본 입자와 힘을 탐구하는 연구가 여기 포함된다. 다만 연구 투자의 관점에서 기초과학은 다르게 분류되는데, 염한웅 교수(포스텍 물리학과)는 “일반적인 의미의 기초과학을 포함해 직접적인 경제적 효과 혹은 산업적 응용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연구를 기초연구라 분류한다”라고 설명했다. 이 경우 실시간 위치 정보 서비스(GPS), 트랜지스터의 개념을 처음 제시하거나 우주 탐사를 위해 로켓을 제작하는 연구도 기초연구에 포함된다.

응용을 위한 연구는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기초과학은 세상을 바꾸는 신기술과 신산업의 기반이 돼 왔다. 질량‒에너지 등가 원리는 백여 년이 흘러 원자력 에너지 산업의 근간이 됐고, DNA 구조를 규명한 것은 30여 년이 지나 제약 기술을 가능하게 했다. 염 교수는 “백여 년 전 탄생한 양자역학은 상상하지 못했던 연산력을 가지는 양자컴퓨터 기술로 우리의 눈앞에 다가와 있다”라고 전했다. 신산업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기초과학은 국가 경쟁력의 주춧돌이 된다. 권기석 교수(한밭대 공공행정학과)는 “기초과학은 유용한 장비, 테크닉, 분석 방법을 창출한다”라고 말했다. 

 

갈 길은 먼데, 깜깜한 앞날

한국의 기초과학은 다른 나라에 비해 진행된 역사가 짧음에도 불구하고 비약적 성장을 거듭해 왔다. 기초연구법이 제정된 것은 1989년으로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의 「미래창조사회 구현을 위한 기초연구 발전방안」에 따르면 2014년 기준 한국은 총 51,588편의 SCI 논문을 게재해 세계 10위에 안착하는 성과를 거뒀다. 성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발표한 「2023년도 기초연구사업 시행계획」에 따르면, 미국 주요 학술지(NSP)에 실린 국내 논문 수는 2016년 58편에서 2020년 94편으로 큰 증가를 이뤘고, 같은 기간 JCR* 상위 10% 논문의 게재 수도 2,767편에서 3,944편으로 유의미한 증가를 기록했다. 박상욱 교수(과학학과)는 “한국은 몇몇 산업기술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있고, 그에 기반이 되는 기초과학 분야의 능력도 뛰어나다”라고 전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기초과학 강국이 되기에는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 있다. 기초과학연구원 노도영 원장은 “기초과학 연구는 다른 많은 연구를 촉발하는 중심 연구와 중심 연구에서 제시한 문제를 풀어내는 연구로 나눌 수 있는데, 한국은 과학의 주도권을 이끄는 중심 질문을 던진 적이 거의 없다”라고 지적했다. 가령 2000년 미국의 클레이 수학연구소가 제시한 7개의 난제인 ‘밀레니엄 문제’는 수많은 수학자에게 연구의 방향성과 목표를 정해준다. 이는 중심 연구가 많이 진행되는 기초과학 강국이 가지는 권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염한웅 교수 또한 “한국은 기초과학을 통해 새로운 산업 혹은 분야를 개척해 내는 성과를 이룬 적이 없다”라며 안타까움을 전했다. 노 원장은 “한국에서 아직 과학 분야의 노벨상이 나타나지 않은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라고 덧붙였다.

*JCR: Journal Citation Reports의 약자로, 전 세계 학술지의 순위를 인용 수를 바탕으로 산출한다.

 

자율성 없는 지원, 나타나는 한계

전문가들은 특히 기초과학 R&D 지원 체계가 가지는 문제가 한국 기초과학이 더욱 발돋움하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한다. 물론 기초과학 연구는 결과가 단기간에 나오기 어렵기에 국가 투자에 의존하는 형태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예산 분배과정 자체에 대한 모든 결정권을 국가가 가지는 한국의 현 세태가 문제라는 것이다. 권기석 교수는 “영국과 미국의 경우 국가가 과학 분야의 예산을 분배할 때 최소한으로 개입하는 대신 이를 과학자 커뮤니티의 자율성에 맡긴다”라며 “이와 달리 한국은 정부 각 부처가 R&D 사업을 진행하고 모든 예산 집행에 대한 검토와 승인을 정부가 담당하는 형태”라고 밝혔다. 권 교수는 이어 “전문가가 아니면 과학계를 심도 있게 이해하기 어려운 현재 모든 판단을 공무원 조직이 진행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라고 짚었다. 문길주 석좌교수(고려대 에너지환경대학원) 역시 “연구자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보장해야 하는데, 현행 제도와 정계의 태도는 신뢰보다는 감시와 간섭을 기반으로 한다”라고 지적했다.

이와 같은 기조는 한국의 기초과학이 발전해 온 역사적 맥락과도 관련 있다. 권기석 교수는 “과학자 커뮤니티에 의해 자생적으로 과학이 발전한 유럽과 달리 한국에서 과학은 국가 주도 R&D 사업으로 시작됐다”라며 한국의 기초과학 예산 분배과정에서 과학자들의 목소리가 유난히 약한 이유를 설명했다. 노도영 원장 역시 “전후 한국은 빠르게 다른 나라를 추격하는 것이 국가적 과제였고, 과학은 그 절박한 목표를 위해 국가가 휘두르는 도구였다”라고 말했다.

도구로서 효율성을 우선한 한국의 기초과학 지원은 ‘선택과 집중’ 중심의 R&D 체제 성립으로 이어졌다. ‘선택과 집중’은 미래에 도움이 될 것으로 예측되거나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분야에 예산을 집약해 발전시키는 전략이다. 하지만 이 전략은 기초과학의 근본적 특징들과 대척점에 서 있다. 염한웅 교수는 “현재 가장 촉망받는 기초연구 분야는 인공지능과 양자컴퓨터인데, 이들은 지난 30년간 선택과 집중 기조에서 가장 소외돼 온 분야”라며 “기초과학의 근본적인 특징은 어떤 연구가 미래에 어떻게 거대한 변화로 이어질지 알 수 없다는 점인데, 성공할 분야를 골라 투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설명했다. 노도영 원장 역시 “이미 각광받는 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방식은 다른 나라와 격차를 좁힐 때는 좋지만, 새로운 질문을 발굴해야 하는 기초과학에는 부적합하다”라고 전했다. 권기석 교수 역시 “연구 다양성이 높아졌을 때 유의미한 연구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라고 덧붙였다.

효율성을 핑계로 전무후무한 R&D 예산 삭감을 진행한 윤석열 정부의 기초과학을 바라보는 방식은 이런 한국 기초과학 지원 체계의 악습을 심화시킨다고 비판받고 있다. 2022년 정부가 선정한 국정과제 ‘국가수요를 반영한 전략적 기초연구 투자 확대’는 선택과 집중의 태도를 정책의 핵심에 놓은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노도영 원장은 “예산 감축도 큰 영향을 미쳤지만, 지식에 대한 호기심과 사명감으로 연구해 온 연구자들이 신뢰받지 못하고 감시의 대상으로 지목된 데에서 오는 현장의 상심이 크다”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권기석 교수 또한 “현 정부는 과학기술 예산 결정 과정에서 행정부의 결정권을 더욱 강화하려는 듯하다”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도구보다는 목적으로

그렇다면 한국의 기초과학 지원 정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딜까. 전문가들은 개별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 있는 학자를 중심으로 지원하는 방식이 기초과학 연구에 유리하다고 제언한다. 권기석 교수는 “현재의 예산 지원 방식으로는 학자가 주제를 자유롭게 선정하는 데 한계가 있다”라며, “연구자가 되면 원하는 주제를 꾸준히 연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본의 제도는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라고 설명했다. 노도영 원장은 “이런 지원이 이뤄지면 과학자가 더 할 만한 직업이 될 것”이라며 “타국 인재의 유입과 자국 내 기초과학 연구 희망자 증가를 기대할 수 있다”라고 현 기초과학계가 겪고 있는 심각한 연구인력 부족 문제에 대한 해결 가능성도 내비쳤다. 한국 내에서도 이런 방향의 지원을 시도하는 기관이 있는데, 2011년 설립된 기초과학연구원(IBS)이다. 노 원장은 “이곳은 실용적 성과에 대한 부담 없이 원하는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라고 밝혔다. 비록 기초과학연구원이 담당하는 연구는 한국 기초과학계에서 아직 일부에 불과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시도가 확대될 때 더욱 다채로운 기초과학 연구가 수행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국가 중심으로 연구 예산이 배분되는 현 체계에서 탈피하기 위한 현실적인 제안도 이어졌다. 문길주 석좌교수는 “국가 중심의 소규모 정부출연연구기관 체제에서 벗어나, UC 버클리의 로런스 버클리 연구소와 같이 대학을 중심으로 거대한 연구 집단이 형성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며 “대학은 자유로운 공간인 만큼 정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독립적인 연구를 기대할 수 있다”라고 전했다.

과학을 경제성장의 도구로 보는 태도가 비효율적인 국가 중심 연구와 과학자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체제로 이어졌기에, 과학 분야를 대하는 정부의 근본적인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과학 자체의 가치를 이해하고, 과학자를 신뢰해 자율성을 보장하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노도영 원장은 “과학의 행위를 그 자체로 가치 있고 사회적으로 명예로운 일로 인식하게 되면 자연스레 기초과학의 길을 업으로 택하는 것의 부담도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기초과학을 장기적 프로젝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전치형 교수(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는 “기초과학은 투자 성과가 한 정권 내에서 나오기 힘들 만큼 긴 시간이 걸린다”라며 기초과학의 생태를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도영 원장은 “장기적 관점에서 투자해야 큰 부가가치를 얻을 수 있다”라고 전했다.

 

노도영 원장은 “누리호 발사에 성공했을 때 우리 국민이 함께 벅차오르고, 기뻐했던 것은 단지 경제적 성과가 기대돼서가 아닌 학문의 발전 그 자체에 대해 뿌듯함 때문이었다”라며, “우리는 목적 그 자체로 과학을 대하는 당당한 세계 시민이 될 수 있는 여건을 모두 만족했기에 인식과 제도도 이에 발맞춰야 한다”라고 말했다. 가능성을 신뢰하는 자신감과 넓은 안목에 기반한 자유로운 투자 속에서 한국은 비상 상황을 딛고 마침내 기초과학 강국으로 비상할 수 있을 것이다.

 

삽화: 김예라 기자 

siksik0928@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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