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블라다(지능정보융합학과 석박사통합과정)
문블라다(지능정보융합학과 석박사통합과정)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감동하는 문화가 참 많다. 그중에서도 ‘임산부 배려석’이 손꼽힌다. 나 역시 한국의 대중교통을 처음 탔을 때 놀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임산부 배려석이 보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자란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여성에 대한 배려를 매우 중시한다. 그래서 대중교통에서 노인과 아이뿐만 아니라 여자에게도 자리를 자연스럽게 양보한다. 임산부는 말할 것도 없이 대중교통에 타는 순간 앉게 된다. 그러나 한국은 조금 다른 것 같다. 물론 역사, 정치, 문화의 발전 과정에서 성의 ‘결과적 평등’을 강조해 왔기에, 여성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서로 다른 문화권인 만큼 공감하지 못하더라도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려고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형성된 ‘임산부의 인식’과 ‘임산부에 대한 인식’이 조금 이상한 것 같다. 

며칠 전에 관악에서 논문제출자격시험을 친 후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저녁 7시쯤 1호선을 타니 유명한 ‘지옥철’을 2시간 동안 즐길 수 있었다. 뭐, 학생이니까 익숙한 패턴이다. 그런데 그날 유난히 희한한 상황을 관찰했다. 사람으로 가득 찬 열차에 배가 부른 임산부가 들어와서 젊은 남자 앞에 섰다. 바로 뒤에 임산부 배려석이 있었으나 거기에는 노인이 앉아 있었다. 임산부가 노인을 보고 미안해서인지 그쪽을 향하지 않고 그냥 서 있는 채로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녀 앞에 앉아 있던 젊은 남자는 전부터 메시지로 활발한 논의를 하는 셈이었다. 당연히 자기 시선보다 위에 있는 분홍색 배지를 보지 못했다. 여기까지는 대부분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말할 것이다. 한국에서 7년째 사는 나도 안타깝다는 생각만 하고 다시 전자책을 봤다.

그런데 몇 정거장 뒤에 보니 임산부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숨이 가빠졌다.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수십 명이 몹시 좁은 공간에 갇혀있을 때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답답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하지만 진짜 놀라운 것은 그를 도와주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바로 옆에 서 있는 승객들도 그의 상태를 무시했다. 임산부는 뒤에 앉은 노인과 앞에 앉은 남자를 번갈아 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내게는 그것이 제일 충격적이었다. 

나는 참다못해 쓰러질 것만 같은 그의 근처로 이동해서 앞에 있는 남자에게 일어나 달라고 요청했다. 여전히 열렬한 문자를 하던 그는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당황한 채로 나를 보면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임산부를 가리키면서 말을 꺼내자 그는 곧바로 자리를 양보하고 나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물론, 그녀도 앉자마자 그랬다.

이 상황이 과연 올바를까? 개인적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의아하다. 결국 임산부는 자리를 양보해 달라는 말이 민망하고, 그 남자는 눈치채지 못해서 민망했다. 솔직히 임산부도 젊은 남자도 노인도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모두가 그 이상한 ‘민망함’을 느껴야만 하는가? 서로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을 수는 없을까?

물론, 모두가 핸드폰을 열심히 보는 도중에 지하철 속 수많은 사람 중에서 임산부를 볼 확률은 매우 낮다. 또한 서 있을 공간도 부족할 때는 배려석을 무조건 비워두는 것도 합리적이지 않다. 그러면 임산부가 신호를 주면 모든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녀도 앉고 다른 사람도 제때 양보하지 못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신호를 안 주는 것인지 못 주는 것인지, 신호를 편하게 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은 것 아닌지 의문이다. 아마 그 임산부는 그동안 사람들의 거절이나 눈치로 인해 몸이 불편하더라도 도움 요청에 침묵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앞으로는 임산부가 편히 도움을 요청하고 그 요청에 민망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돼야 한다.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 용기가 필요하지 않고 민망해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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