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은 취재부장
박세은 취재부장

이 글의 제목이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내가 “이번 주 맥박 제목은 내 맥박수가 될 것”이라고 어제 편집국에서 선언했을 때, 편집장은 못 들은 척했고 편집 기자는 “비표준적이네요”라고 했다. 글이 읽히는 시점에 아직도 이 글의 제목이 숫자만으로 이뤄져 있다면, 나는 결국 지난 신문사 생활 내내 꿈꿔왔던 바를 이뤄낸 것이다. 이 글은 맥박수가 들어간 최초의 ‘맥박’이 될 것이다.

내가 맥박수 있는 맥박을 처음 주장한 것은 지난해 겨울이었다. 그때 신문사 사람들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숫자 몇 개 덧붙이자는 제안이 뭐가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느껴졌는지 잘 모르겠다. 물론 전례가 없다는 점에서 비표준적이라는 말에는 백번 동의하지만, 단지 그 이유만으로 이 제안이 반려된 것이라면 억울했다. 그래서 도대체 어떤 기준에서 ‘맥박에는 맥박수가 있어야지’라는 내 제안이 반려된 것인지 물어봤다. 그러나 아무도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물론 데스크의 칼럼인 맥박은 내가 앞서 주장한 것과 같은 단순 어휘적 의미의 ‘맥박’이 아니다. 따라서 앞의 에피소드에는 어느 정도 농담이 섞여 있다. 그러나 내 제안이 명확한 이유도 없이 비정상 선고를 받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흔한 정상‒비정상 판단이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명확한 근거도 없이 형성되는지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시선으로 누군가를 바라보고 그가 비정상적이라고 판단할 때, 이 정상성의 중심에는 ‘내’가 상정돼 있다. 우리는 이렇게나 쉽게 스스로를 기준 삼아 정상‒비정상 판단을 내리고는 한다. 물론 혹자는 이때 정상성의 중심에 상정돼 있는 것은 개인으로서의 ‘나’가 아닌, 경험에서 도출된 평균적 정상성이라 주장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정상성의 중심을 경험적으로 구해낼 수 있다는 말은 언뜻 보면 타당한 것도 같다. 그러나 개인으로서 경험한 한정적인 상황들로 평균을 구하고, 이를 기준 삼아 전체 외연 속 하나하나의 정상성을 판단하는 것은 거꾸로된 것이다. 몇 개의 개별값을 가지고 평균을 계산할 수는 있어도, 평균만을 사용해 전체의 개별값을 온전히 복원해 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누군가를 비정상이라 판단하기 전에, 정상성의 중심에 스스로를 세워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또 어떤 판단을 내릴 때 이미 마련돼 있는 내적인 기준보다는 각각의 개별이 처한 상황에 귀 기울여야 한다. 물론 이 과정은 직관적으로 내리는 판단에 비해 확실히 비효율적이다. 그러나 기준이 아닌 상황에 집중할 때, 비정상으로 간주될 뻔한 무언가를 바로 볼 수 있다. 정상과 비정상을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고 개별적인 상황을 들여다보는 것은 꽤나 성가신 일이지만 이는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며, 이런 노력이 있을 때 나 자신도 진정 이해받을 수 있다.

이 글의 제목은 왜 ‘102’여야만 했을까? 일반적인 정상 맥박수는 1분에 약 60~100회다. 그러나 운동 후, 혹은 화가 나서 흥분한 상황에서는 정상 박동이더라도 일시적으로 100회를 넘을 수 있다. 지금 내 맥박수는 102회다. 하지만 내 맥박수도 비정상이 아닌데, 나름의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오전 세 시 졸린 상태에서 맥박을 쓰려니 맥박이 좀 빨리 뛴다. 나는 ‘102’라는 글의 제목을 비정상적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를 당신을 이해하고 싶다. 나는 당신으로부터 이해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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