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현 교수(법학과)
전상현 교수(법학과)

중간고사 기간이 다가왔다. 시험은 학생뿐 아니라 교수에게도 고뇌의 시간이다. 채점 때문이다. 대동소이한 답안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차이를 발견하고 다른 점수를 주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러나 비슷해 보이는 것들 사이에서 차이를 발견하고 구별해야 하는 고뇌는 채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식의 상당 부분은 비슷해 보이는 것들 사이 존재하는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고, 전문가란 일반인들은 구별하지 못하는 미세한 차이까지 식별할 수 있는 사람이다. 사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차이를 인식하고 구별한다. 선택의 순간 우리에게 기준이 되는 것은 비교 대상 사이의 ‘차이’다. 점심시간을 어디서 보낼지는 식당의 위치, 메뉴의 종류, 맛, 가격 등을 기준으로 한 차이가 결정한다. 차이가 없다면 고민도 없다. 차이를 구별하는 일은 말 그대로 일상다반사다. 

차이를 구별하는 일은 사람을 상대로도 행해진다. 차별은 사람들 간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성별, 지역, 인종, 국적, 외모의 차이를 인식함으로써 각종 차별이 발생한다. 그래서 차이를 구별할 수 없다면 차별도 없다. 미국 연방 대법원의 판결문 중에서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레토릭 중 하나를 꼽자면 ‘우리 헌법은 색맹이다’(Our Constitution is color-blind)라는 문장이다. 인종차별 금지를 규범적 당위에서 물리적 불능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인종차별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를 직관적 비유로 웅변했다. 피부색을 구별할 수 없는데, 피부색으로 차별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백인들이 이용하는 공중 시설을 유색 인종들은 함께 이용할 수 없도록 금지한 것에 대해, 인종을 분리하더라도 동등하게 처우하기만 하면 평등원칙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했던 1896년의 판결에서 반대의견을 낸 재판관의 말이었다. 이후 이 문장은 미국 역사에서 각종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레토릭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그런데 지난 6월에는, 인종차별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 유색 인종을 우대하는 이른바 적극적 평등실현조치가 평등원칙에 위반된다는 판결에 위 문장이 원용됐다. 미국 하버드대는 신입생을 선발하면서 인종적 다양성을 위해 합격자 비율이 낮은 인종에 속한 학생들을 다른 점수가 부족하더라도 합격시키는 적극적 평등실현조치를 실시하고 있었다. 주로 흑인과 히스패닉 학생들이 혜택을 보고 있었는데, 그것이 평등원칙에 위반된다는 것이었다. 반면, 반대의견 재판관들은 미국 사회에서 계속돼 온 인종차별의 역사와 대학에서 인종적 다양성이 갖는 중요성을 지적하면서 대학이 입학시험에서 인종을 고려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인종의 차이는 어떤 이유에서도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인가? 소수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인종을 근거로 차별하는 것도 허용되는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일체의 차이를 부인하는 것은 차별을 없애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차이가 없으면 차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이가 없는 것과 차이를 무시하는 것은 다르다. 모두를 똑같이 취급하면 누구도 차별하지는 않겠지만 그것이 언제나 공평하다고 할 수는 없다. 소득이나 재산에 상관없이 모든 국민에게 같은 금액을 세금으로 걷는 것은 불공평하다. 생활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만 생계비를 지원하는 것은 차별이기는 하지만 불공평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장애가 있어 답안 작성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에게 시험시간을 더 부여한다고 해서 부당한 차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세상에 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부정하는 무차별은 무관심(indifference)이고 무분별(indiscrimination)이다. 차이를 인식하되 그 차이를 이유로 차별하는 것이 과연 공평한 것인지 묻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차이는 무시해야 하지만, 어떤 차이는 존중돼야 하고, 어떤 차이는 고려해서는 안 되지만, 어떤 차이는 고려돼야 한다. 말하자면, 분별 있는 차별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차별이 분별 있는 차별인가? 화두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