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희진 강사(국어국문학과)
최희진 강사(국어국문학과)

산 사람이 위로가 되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 연일 쏟아지는 정치면과 사회면의 사건·사고 기사, 돌이킬 수 없이 번져 있는 혐오의 풍조, 그 속에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냐는 무력감과 자괴감, 바로 지금 내 옆에 있는 그 사람의 허위 또는 나 자신의 허위, 그것들로 다 설명되지 않는 개인의 순간들, 그런 것들이 모여 폐쇄와 함묵의 시간을 만든다. 

산 사람의 말이 위로가 되지 못할 때면 부러 죽은 사람들의 말을 그러모은다. 예컨대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의 넋이여, 내가 노래했던 사람들의 넋이여, 나를 강하게 해주소서. 나를 북돋아 주소서. 그리고 세상의 허위와 썩은 공기로부터 나를 멀게 해주소서.”와 같은 문장들. (보들레르, 「새벽 1시에」) 시간과 공간의 너머에 누군가가 ‘인간으로서’ ‘있었음을’ 그 문장을 통해 증명받는다. 세상의 고통 속에 무방비하게 던져진 것이 나뿐이 아님을 증명받는다. 

‘인간은 고통받는다.’ 이 문장의 주어가 ‘모든 인간’이 되지 못하고 ‘나’로 한정될 때 그 고통은 너무나도 부당하고 불합리한 것이 된다. 그렇기에 한밤의 독서 속에서 인간은 타인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 혹은 나 자신의 세계에서만 흘러넘치는 것처럼 보이는 절망 속에 익사하지 않기 위해 타인의 세계를 상상한다. 1990년대 대한민국의 한 시인은 “〈메탈리카〉 같은 빗줄기 속에서” “창밖에 삼경의 비 내리는데/ 등 앞엔 만 리의 마음 달리는구나”라는 최치원의 한시를 떠올린다. (진이정, 「헤비메탈 같은 비」) ‘헤비메탈 같은’ 마음의 빗줄기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 내가 아닌 누군가 역시 언젠가 그 속에 있었다는 사실이 질식할 것처럼 스산한 어느 밤의 적요를 위로한다. 

“찾아야 한다. 무슨 일이 있든지 반드시 찾아내야만 한다. 향배를 잃어버린 나의 방향은 어디에 있는가. 나의 이념이여! 조금만 조금만 맑아지거라. 나의 생존의 의의란 어디에 있느냐.” (오장환, 「팔등잡문」) 삶의 방향과 생존의 의의를 잃은 고통이 나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이 문장의 수신자는 알게 된다. 그 모든 고통이 나만의 것이 아니었으며 나는 혼자 버려진 것이 아니었다는 메시지가 시공을 넘어 피부에 와닿는다. 방황하거나 방황했던 것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누군가가 그곳에 있었다는 그 사실이, 어떤 인간에게는 끝내 그 자신을 이곳에 붙들어놓는 거멀못이 된다. 누군가가 어떤 문장을 오래 붙들고 있다면 그에게는 그럴 이유가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 없는 자의 목소리를 목발처럼 짚고 서서히 방문을 연다. 내 옆에 있던 것 역시 다만 살아남고 있는 한 명의 인간이었음을 감각하기 위한 출발선에 다시 한번 선다. 인간에 대한 의지와 믿음을 회복해가는 시간 속에서 폐쇄와 함묵의 시간은 서서히 물러난다. 그리하여 살아남았을 때, “누군가 멀리서 내내 당신을 돕고 있습니다.” (이제니, 「발견되는 춤으로부터」) 이와 같은 산 사람의 목소리는 그제서야 들린다. “우리들의 노래가 과연 이 세상에다 바늘 끝만한 광명이라도 던져줄 수가 있을 것입니까”라고 김소월은 스승 김억에게 절망적으로 물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글은 다른 누군가가 생의 끝자락을 붙들게 하는 광명이 되기도 한다. 이곳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이들에게는 저곳의 이가 위로를 건네고 있다. 산 사람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도록, 수신되지 않은 메시지를 수신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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