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박재아 기자 0204jaea@snu.ac.kr
삽화: 박재아 기자 0204jaea@snu.ac.kr

낯선 이들의 죽음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다. 각종 뉴스 매체와 소셜미디어를 통해 연일 중계되고 있는 하마스‒이스라엘 전쟁뿐만 아니라, 며칠 전 1주기를 맞았던 이태원 참사까지. 우리는 점점 더 자주, 시시각각 도착하는 재난의 이미지들과 대면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참사의 현장 바깥에서, 참사를 목격하고 있는 나 혹은 우리의 위치는 어디쯤인지를 자꾸만 되돌아보게 된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최근에 벌어진 비극적 사건들 때문만은 아니다. 『대학신문』 70주년 전시를 준비하며 찾은 1980년대의 캠퍼스 사진에서, 나는 동료 시민들의 억울한 죽음을 벽보와 사진 등을 통해 뒤늦게 접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학생들을 발견했다. 특히 그 시절 관악에서 80년 5월 광주의 진실을 알게 된 서울대생 중에는 5월의 광주를 기억하며 투신했던 많은 ‘열사’들이 있었다. 『숭배, 애도, 적대』(2021)에서 천정환은 뒤늦게 광주의 참상을 목격한 이 젊은 열사들에게 자살은 애도와 저항의 방법이었다고 설명한다. 산화하는 열사의 이미지는 말 그대로 몸소 저항의 횃불이 되고자 했던 청년들의 순수한 희생정신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학신문』 1986년 6월 2일 자)

하지만 이런 “1980년대적인 죽음”의 이미지를 지금 나의 감수성으로 이해하기란 솔직히 쉽지 않았다. ‘열사’와 ‘추모제’가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80년대 『대학신문』의 사진 기록을 살펴보면 볼수록 놀라움과 함께 근본적인 의문이 뒤따랐다. 그러니까 사후적으로 목격한 광주의 이미지 속에서, 먼저 희생당한 광주의 시민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고, 심지어 그들과 함께하고자 목숨을 던지겠다는 결단에 이르는, 이 모든 과정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시공간의 간극을 넘어 목격자(=나)와 희생자(=너)를 ‘우리’(나=너)로 묶는 감각이 자연스럽게 성립될 수 있었던 1980년대란 과연 어떤 시대였을까?

누군가는 지금의 청년 세대야말로 스마트폰과 SNS로 나와 타인이 더 가깝게 연결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디어에서 송출되는 재난 현장을 마주할 때마다 내가 감각했던 것은 ‘우리’가 연결돼 있다는 느낌이라기보다, 기실 ‘우리’라는 말이 허물어지는 느낌에 가까웠던 것 같다. 동시대 매체 환경에서 공동체라는 단어를 한정했던 전통적·폐쇄적인 범주는 상당 부분 효력을 상실한다. 특히 거리에 상관 없이 세계 각국의 재난 상황이 동시적으로 공유되는 세상에서 목격자의 시야는 이제 국민국가의 경계에 제한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은 더 많은 사건을 ‘우리’의 일로 수용할 수 있는 감수성을 요구하는 한편, ‘우리’라는 말이 전제하는 장소성을 더욱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따라서 생중계되는 참사의 현장을 목격하면서도 그것을 정말 우리의 일로 받아들이는 일은 더욱 어려워진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참사들이 손쉽게 외면당하고 있는지 한번 떠올려 보자.)

그렇다면 목격자와 희생자를 연결하는 공동체의 감각은 앞으로 어떻게 다시 재구성될 수 있을까? 지금 시대에 필요한 목격자의 윤리는 최소한 이런 물음을 지속하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대의 초국적이며 일상화된 재난은 민족이나 국가처럼 폐쇄적인 한정사에 ‘우리’를 귀속시키거나, 세계시민같이 추상적인 명사로 ‘우리’를 대체해 버리는 일 없이 ‘우리’라는 말을 재발명할 것을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허민석 간사 

rabbi1992@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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