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 예술인 권리 보장이 걸어온 지난한 길

어려운 신인 시절 무심코 맺었던 계약으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작가들이 있다. 2003년 『구름빵』의 저자로 알려진 백희나 작가는 그림책에 대한 저작권을 양도하라는 출판사의 설득에 따라 계약을 체결했다. 서명이 불러온 결과는 참혹했다. 그는 자식 같은 캐릭터가 안내도 없이 2차 가공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2차 가공으로 얻은 수익에 대한 충분한 정산도 받지 못했다. 백 작가는 출판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계약서의 효력을 근거로 출판사의 손을 들어줬다. 양 당사자가 대등한 위치에서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는 일반적인 계약 체결과는 달리, 이처럼 문화예술계에서의 계약 체결은 불평등한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예술인의 권리 보장, 시행착오 속에서 성장하다

예술인의 부당한 권리 침해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자 정부는 법적으로 예술인의 사회적 지위와 권리를 명시하는 대책을 강구했다. 2011년 제정된 ‘예술인 복지법’에는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된 환경에서 예술 활동을 할 권리 △불공정한 계약을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 등 예술인의 지위와 권리가 최초로 규정됐다. 그러나 이 법은 권리만 명시할 뿐 권리를 침해당했을 때 예술인을 구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절차를 명시하지 않아 실효성 논란이 있었다. 김시범 교수(국립안동대 한국문화산업전문대학원)는 “예술인들은 권리 침해를 경험했을 때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예술인 신문고’에 신고할 수 있게 됐는데, 신고를 해도 법률 지원을 받는 정도에 그쳤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2021년 ‘예술인의 지위와 권리의 보장에 관한 법률’(예술인권리보장법)이 다시금 제정됐다. 특히 예술인권리보장법은 기존 예술인 복지법의 한계로 지적됐던 피해자 구제 절차를 구체화했다. 피해구제를 담당하는 예술인 권리보장 및 성희롱·성폭력 피해구제 위원회가 예술인 신문고에서 권리 침해 사례를 받으면 사안을 조사·심의·의결한다. 이후 권리 침해 행위가 사실로 드러날 경우 문화체육부장관은 적절한 시정조치를 취할 수 있다. 

 

해결되지 않은 권리 침해와 권력의 불균형

그러나 법안이 시행되는 지금도 예술인에 대한 권리 침해는 여전하다. 더불어민주당 임오경 의원실이 발표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예술인권리보장법이 시행된 직후인 지난해 9월부터 올해 8월까지 예술인 권리 침해 행위로 신고된 건수는 163건이다. 구체적인 침해 내용으로는 수익배분 거부 및 지연이 87건, 불공정·불이익 계약 강요가 34건으로 높은 축에 속했다. 이외에도 예술 활동 방해·지시·간섭이 13건, 성희롱 및 성폭력 10건, 예술의 자유 침해 6건으로 예술인의 활동 전반에 대한 권리 침해도 꾸준히 존재했다.

두 차례의 법률 개정에도 예술계에 불공정한 관행이 만연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김시범 교수는 예술인의 권리 침해 조사와 구제 절차에서 신고가 필수적이라는 점을 짚었다. 김 교수는 “폐쇄적인 문화예술계 특성상 신고인은 신고를 꺼리게 된다”라고 말했다. 작가노조준비위원회 안명희 작가도 “법률이 존재해 문제가 많이 개선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도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문제들이 많다”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처럼 문화예술계 분위기 자체에 존재하는 기울어진 권력관계가 해소되지 않는 한, 예술인의 권리 침해 문제를 근본적으로 뿌리 뽑기는 어렵다. 문화예술노동연대 이씬정석 대표는 “고용이 불안정한 문화예술계에서 고용과 임금에 권한을 가진 예술 사용자의 권력은 매우 강하다”라고 밝혔다. 안채린 교수(경남대 문화콘텐츠학과)는 “자신의 여건상 권력을 지닌 예술 사용자가 불공정한 계약이나 요구를 제시했을 때 거절하기 어렵다”라고 파생되는 부작용을 설명했다.

 

예술인의 권리가 한 발짝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제도가 예술계 전반의 관행을 포괄하지 못하는 만큼, 전문가들은 권리 침해 사례를 발굴하기 위한 국가 기관의 적극성을 요청했다. 김시범 교수는 “신고자의 부담을 최소화해야 한다”라며 “위원회에서 신고 없이도 조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더불어 “현재 위원회는 상설화가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상근위원도 없다”라며 꾸준한 조사와 구제를 위해서 보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예술인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안명희 작가는 “특히 예술인권리보장법 제14조 제1항에 있는 예술인의 협의할 수 있는 권리가 잘 지켜지지 않는다”라며 “경영 등에 부당하게 간섭할 경우 사용자가 협의 요청에 응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제14조 제2항이 남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일례로 출판사와 계약한 뒤 작가는 자신의 인세를 보장받기 위해 책의 판매 현황에 관한 정보를 요구할 수 있지만, 출판사가 경영 정보라고 주장한다면 요구를 이어나갈 수 없다. 이씬정석 대표는 “예술인 개인들이 정당한 요구를 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노동조합과 같은 예술인 단체의 교섭력이 필요하다”라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예술 생태계 조성이 시급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안명희 위원 또한 “예술인들이 예술인 조합을 구성함으로써 보다 강한 결속력과 연대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예술인 복지법부터 예술인권리보장법까지 예술인의 권리는 모두 누군가의 아픔을 토대로 성장해 왔다. 박경신 교수(이화여대 법학과)는 “예술 생태계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법을 개정해도 상황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불공정한 관행을 바꾸고자 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함을 당부했다. 이제는 오랫동안 예술인을 갉아먹던 낡은 관습 대신 새로운 쇄신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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