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 | KBS 프로그램의 브랜딩과 디자인을 책임지는 김지혜 총괄감독

한 TV 프로그램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많은 이들의 손을 거치지만, 여기 프로그램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얼굴을 만들어 가는 ‘손’이 있다. 바로 프로그램을 브랜딩하는 디자이너의 손이다. 김지혜 총괄감독은 15년째 한국방송공사(KBS) 아트비전에서 일하며 장수 프로그램인 〈한국인의 밥상〉부터 〈연예대상〉과 같은 시상식, 〈사사건건〉과 같은 시사 프로그램 등을 브랜딩했으며 최근에는 곧 부활하는 〈개그콘서트〉를 브랜딩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그의 디자인은 탁월한 감각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지난달 24일 여의도 KBS 신관에서 김 감독을 만나 프로그램에 멋진 옷을 입히고 시청자를 매료시키는 직업, 방송국 디자이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지혜 감독이 브랜딩한 〈한국인의 밥상〉 타이틀.
▲김지혜 감독이 브랜딩한 〈한국인의 밥상〉 타이틀.

 

KBS 프로그램 디자인의 총괄감독이 되다

김지혜 총괄감독은 그림과 예술에 대해 부푼 꿈을 가진 미대생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멈춰있는 한 장의 화폭은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담기에 부족했다. 그래서 그는 그림을 움직인다면 더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고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해 미디어아티스트를 꿈꿨다. 그러다 용돈이 끊겨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고, 우연인지 운명인지 마감 하루 전날 지원한 KBS아트비전 디자인팀에 입사했다. 

현재 김지혜 감독은 브랜딩 과정 전체를 총괄하는 총괄감독의 직책을 맡고 있다. TV 프로그램에 필요한 여러 디자인 요소 제작을 담당하는 KBS아트비전에 15년간 몸담은 그는 수많은 프로그램을 디자인하고 브랜딩했다. KBS의 대표 장수 프로그램인 〈뮤직뱅크〉, 〈아침마당〉, 〈걸어서 세계 속으로〉는 물론이고 국가기념일 행사와 연말·연초의 시상식, 비교적 최근 편성된 〈편스토랑〉,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 등도 그의 손길을 거쳤다.

프로그램 브랜딩 작업은 수많은 사람과의 협업으로 완성되는데, 이 과정에서 시각적 일관성을 잃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 것이 김 감독의 일이다. 그는 “제작진이 프로그램 내용을 설명하면 큰 특징이나 중심이 될 만한 이미지, 색에 대한 여러 견해를 조율한다”라며, “이를 토대로 디자인팀에서 시안을 구성하고, 제작진과 여러 차례 협의를 거쳐 세부적인 수정을 거친다”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확정된 타이틀 디자인은 웹 제작팀, 자막 CG팀, 홍보팀에게 전달되고 포스터 제작과 오프닝 CG 제작에 들어가게 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모두 관리하는 김 감독은 “다양한 분야의 디자이너들과 디자인 콘셉트를 공유하면서 시각적 일관성을 유지하고 브랜딩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라고 전했다.

김지혜 총괄감독이 프로그램의 브랜딩 중 특히 신경 쓰는 것은 방송의 얼굴이자 간판이 되는 ‘타이틀’이다. 그는 “프로그램 오프닝이 시작할 때는 연예인보다도 타이틀을 먼저 보여주지 않느냐”라며, “이 방송을 보고 싶은지 안 보고 싶은지는 내가 만든 타이틀에서부터 결정된다”라고 브랜딩 작업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특히 KBS는 공영 방송사로서 공적이고 건전한 방송을 주로 다루기 때문에, 쉽게 채널을 돌릴지 모르는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타이틀 디자인이 더욱 중요하다. 그는 “자극적인 것이 넘치는 시대에 KBS는 어쩌면 딱 ‘흰밥’같이 담백하다”라고 솔직하게 표현하며 “나의 일은 프로그램에 색을 입히고 시각적으로 자극을 줘서 시청자들의 눈길을 끄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기만의 철학으로 프로그램을 브랜딩하다

프로그램의 얼굴인 타이틀을 제작할 때 김지혜 총괄감독이 중시하는 세 가지가 있다. 먼저 프로그램의 내용이나 성격이 타이틀을 비롯한 여러 디자인에 시각적으로 잘 함축되고 명료하게 드러났는가다. 김 감독은 “방송의 타이틀은 그 프로그램을 함축하는 메시지를 담아야 한다”라며 “이를 위해 프로그램만의 분위기, 감성, 방송 시간대, 계절감도 감안한다”라고 말했다. 또한 대중의 입맛에 맞는 보편적인 미감을 잘 반영했는지도 중요하다. 그는 “디자이너의 독특한 글자체를 표현하기보다,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미적인 부분을 더 염두에 둔다”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그는 “타이틀의 무게 중심이나 공간 안배, 색, 그래픽 요소 등이 적합하게 어울렸는지 살펴보고 시청자의 연령이나 성격을 파악하기도 한다”라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는 가독성에 대한 부분이다. 그는 “짧은 시간 안에 명확하게 판독되고 쉽게 이해돼야 하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이라며 “타이틀의 글자체, 크기, 자간 등을 검토해 채널을 넘기는 찰나의 순간 동안 시청자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한다”라고 전했다. 

한글 문체를 애용하는 것도 김지혜 감독의 또 다른 특징이다. 한글은 김 감독이 중시하는 세 가치를 훌륭히 표현할 수 있을뿐더러 그 자체가 디자인적으로 아름답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또박또박 적힌 한글은 공간을 잘 활용할 수 있는 구조”라며 “이런 특성 덕에 한글은 화려한 것이나 다른 나라의 문자와 배치돼도 조화롭게 융화되는 아름다운 문자체다”라고 설명했다. 그가 한글 문체를 사용하는 이유에는 문화적인 이유도 있다. 김 감독은 “방송이 글로벌화되면서 공영 방송사에서 일한다는 사실이 한국을 대표한다는 직업의식을 심어준다”라며 “한글 문체의 아름다움을 해외 시청자에게도 보여주고 싶다”라고 밝혔다. 한글을 아끼는 디자이너로서 한글과 한국 문화를 널리 전파하고 싶어하는 그의 포부가 전해졌다.

▲〈6시 내고향〉을 리브랜딩하는 과정이 담긴 기획안. 타이틀 디자인과 심볼 디자인, 컬러, 코너타이틀 디자인, 세트 디자인 등을 2020년에 리브랜딩했다.
▲〈6시 내고향〉을 리브랜딩하는 과정이 담긴 기획안. 타이틀 디자인과 심볼 디자인, 컬러, 코너타이틀 디자인, 세트 디자인 등을 2020년에 리브랜딩했다.

이렇게 자신만의 철학과 작업 스타일로 오랜 시간 디자인해 온 김지혜 감독에게도 유난히 까다로운 작업이 있다. 바로 오래된 프로그램에 새 옷을 입히는 작업, 리브랜딩이다. 김 감독은 대표적으로 1991년 방영된 〈6시 내고향〉을 29년 만에 리브랜딩했다. 그는 “특히 〈6시 내고향〉과 같이 시청자층의 연령대가 높은 경우 디자인이 조금만 바뀌더라도 시청자가 완전히 다른 프로그램이라고 인식하기도 한다”라며 “리브랜딩은 기존 디자인의 분위기와 결을 유지하면서 재해석하는 과정이기에 더욱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공을 들여 진행한 리브랜딩 작업에 대해 김 감독은 “대중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았던 장수 프로그램을 재탄생시키는 작업이다 보니 어렵기도 했지만, 완성된 프로그램을 보니 뿌듯하고 가슴이 벅차올랐다”라며 당시의 기쁨을 전했다.

 

역사를 쓰고 있다는 기록자의 소명 의식으로

김지혜 감독도 입사 처음부터 디자인에 능통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워낙 잘하는 선배들이 많아 방송국에서 기가 죽어있었다”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어 “당시 방송사에는 선배의 어깨 너머로 실무를 배우고, 모르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사정해야 대강 알려주는 식의 문화가 있었다”라며 디자인 작업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실력이 잘 늘지 않았던 지난날의 기억을 더듬었다.

▲1980~1990년 KBS 고전 타이틀을 아카이빙한 것.
▲1980~1990년 KBS 고전 타이틀을 아카이빙한 것.
▲타이틀 디자인을 연습하는 김지혜 감독.
▲타이틀 디자인을 연습하는 김지혜 감독.

그는 우연히 창고에서 옛날에 손으로 작업했던 선배들의 먼지 쌓인 작품들을 발견했다. 김 감독은 고전 타이틀을 아카이빙해가며 무작정 따라 그려보기도 하고, 디자인에 어떤 형태와 특징이 녹아있는지 공부했다. 이렇게 그가 옛날 디자인에 관심을 기울이고 공부한 이유는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알라는 공자의 ‘온고지신’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옛것을 공부하면 기본기를 터득할 수 있는데, 이 기본기를 알게 되면 새로운 디자인 하나를 새로이 창작할 때 그 깊이부터가 달라진다”라며 “고전, 즉 밑에 있는 것부터 차곡차곡 공부하는 습성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라고 강조했다.

김지혜 감독에게 평소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을 대하느냐고 묻자, 그는 주저 없이 “나는 단순히 일한다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쓰고 있다는 소명을 갖고 있다”라고 답했다. 이 답변에는 일에 대한 김 감독의 애정과 자부심이 듬뿍 묻어났다. 옛것의 전통과 감각을 연습한 김지혜 감독은 자신 있게 자신을 ‘KBS 프로그램 브랜딩의 과거와 현재를 이야기하는 기록자’라고 소개한다. 그는 “원론적인 것을 배우고 익히며 현대에 맞게 발전시켜 나가는 이 일이 어쩌면 역사를 이어간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전했다. 선배 디자이너들이 해왔던 작업의 숨결을 이어 자신도 디자이너로서 KBS의 타이틀을 쓰는 역사를 함께 하는 것이다.

 

옛것을 배워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사람, 방송의 타이틀을 얼굴과 같다고 표현하는 사람, 시청자들에게 예쁜 디자인을 선물하는 사람. 김 감독을 다양한 수식어구로 표현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그는 일을 ‘행복하게’ ‘즐기는’ 사람이다. 일하는 순간을 즐기고 누구보다 몰두한 김 감독이었기에 그의 디자인이 더욱 반짝이는 것은 아닐까. 과거와 현재의 기록자에서 나아가 KBS의 미래를 이어갈 김 감독을 응원한다.

 

사진: 박선영 기자 leena1208@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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