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성 편집장
조은성 편집장

며칠 전 읽었던 찝찝한 소설 한 권이 뇌리를 스쳐간다. 로베르트 발저의 소설 『벤야멘타 하인학교』는 성장과 발전, 성공 신화를 내세우는 이상적인 인간상의 전형에서 벗어나 ‘훗날 아주 미미한 존재’가 될 작은 존재들을 다루는 일종의 반(反)교양소설이다. 귀족 출신의 자제인 야콥 폰 군텐은 하인을 양성하는 벤야멘타 학교의 훈련생이 되겠다는 뜻밖의 결심을 내린다. 이후 책의 전개는 이전 삶의 회고, 학교에서의 생활상과 구성원들과의 교류 정도로 축소되고 만다. 귀족 지위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한 채 하인이 되겠다는 계층적 하강, 바깥세상과의 단절된 채 벤야멘타의 이상적인 소년상이 적힌 교재의 똑같은 범위를 달달 암기하는 그의 일상은 언뜻 보기에 퇴보와 다름없다. 흥미로운 대목이라면 하루빨리 하인으로 취직해 돈을 벌고 부자가 되겠다는 야콥의 모습에 벤야멘타 교장이 “아직 넌 이곳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다”라고 지적하는 장면이다.

벤야멘타 하인학교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은 ‘흠잡을 곳 없이 동그란 영’(0)이다. 작품은 ‘앞’이라는 진보의 방향성을 규정하는 일을 거부하고 기꺼이 원을 그리며 도는 삶을 지향한다. 따라서 이 학교의 교육 이념은 개인 삶에서의 자유나 성취 담론을 주입시키는 일반적인 학교와 다르다. 오히려 이곳은 훈련생이 자신의 두뇌를 학문적 지식으로 채우는 것과 세속적인 성공을 갈망하는 것을 경계한다. 학문적 지식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점차 과대평가하게 만들어 후에 모욕을 당하는 시점에서의 자신을 취약하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타인의 기준선에 맞춰 달성한 성공은 오히려 과한 자기만족과 허영심을 불러일으키거나 정서적인 공허함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대신 학교는 몸에 배일수록 성공과는 오히려 멀어질 듯한, 인내와 복종의 개념을 가르친다. 그 안에서 훈련생들은 무익하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을 반복하는 법, 강제와 결핍에 직면하는 법, 상실감을 느끼고 극복하는 법 등을 배운다. 이는 야콥에게 부를 향한 갈망을 채워주지는 않지만, 작고 확실한 내면의 성공을 이끄는 훈련이 된다.

적절한 시공간성에 대한 명시도 없이 야콥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이 작품의 서술 방식은 서사의 단선적 전개구조까지 끊어낸다. 끊임없는 자기계발을 통해 개인의 경쟁력을 인정받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현대인의 사고방식 안에서 발전 담론을 거의 해체시키는 이 작품은 읽는 내내 묘하게 언짢은 감정을 남긴다. 그러나 몇 번이나 책을 덮을까 고민하면서도 독자로서 이런 ‘작게 존재하고 작게 머무는 인물’들에게 끝까지 눈을 떼지 못했던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이 작품은 우리의 삶 역시도 도전과 자기 증명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순회하는 ‘0’과 유사하다는 핵심을 꼬집는 동시에 현대 사회가 발전이라는 강박적인 관념에 현대인을 가둔다는 사실을 가장 불쾌한 방식으로 자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기에 현대인은 저마다의 마음 한켠에 회의감과 불안감을 안고 살아간다. 더더욱 우리에게는 성공보다는 실패를, 성취보다는 상실을, 자유보다는 객체로 위축되는 현실에 견딜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절실하다. 야콥과 학교가 지향하는 ‘아주 근사하고 동그란 영’(靈)의 가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무언가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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