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동 기자(사회문화부)
유현동 기자(사회문화부)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지동설은 우주 속 인간의 존재론적 위상을 영원히 바꿔 놓았다. 데카르트가 수학으로 세상을 봤던 것은 인간이 우주를 수식으로 지배할 수 있는 공간으로 파악하게 된 토대가 됐다. 그 끝에 탄생한 양자역학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를 나타내는 핵무기를 인류의 손에 쥐여 줬다. 교육과정을 충실히 따라온, 적어도 나와 같은 소위 이과 학생에게 세계를 보는 자연스러운 방식은 이처럼 빼어난 아이디어가 세상을 이끈다는 근대적 세계관이다. 하지만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투하됐을 때 근대는 끝났고 우리는 현대를 살아간다. 시대를 바꿔왔다고 믿었던 생각들이 기실 이성의 폭력 앞에 재단된 과거임을 이제 안다. 

현대에서 생각의 가치는 해체됐고, 사회가 가치를 부여한다는 개념 자체가 무너지며 현실은 자본과 기술로 재구성된다. 이는 첫째로 이성이 시대를 지배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포스트 담론에서 배웠기 때문이고, 둘째는 자본주의와 고도화된 기술이 사회를 지배하는 지금, 돈과 거대한 사회 시스템이 만드는 환상이 기존의 가치를 대신하게 됐기 때문이다. 대학과 기업이라는 시스템에서 기술 발전은 어느 때보다 눈부시지만 역설적으로 시대는 빛나는 생각을 요구하지 않는다. 고전적 시대정신을 이끌던 ‘지식인’은, 지식 그 자체와 함께 모든 사람이 쉽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시대에서 그 쓸모를 다한 듯하다. 개인은 체제를 존속시키는 한편 기술을 발달시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시스템의 부품으로 전락했다. 무너진 가치의 폐허에 자리 잡은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는 현실을 잡아먹고 현실이 된다.

근대가 끝나고 지금의 현대가 찾아왔다는 그 자명함은 내게 쉬이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인류가 쌓아온 사유의 탑을 높이는 것이 시대에 직접 기여하는 일이라는 근대적 믿음 속에 대학에 왔기에, 사유의 가치가 해체된 현대 사회를 마주하고 허탈함을 느꼈다. 가치 있는 아이디어가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못하는 소통의 문제가 이런 시대를 만든 것은 아닐까, 고민의 흔적과 윤리가 사람들에게 전달될 때 다시 사회와 학문이 가치를 되찾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대학신문사에 들어와 기초연구의 가치, 탈진실의 철학을 보도했지만 결국 가치가 조각나고 흐려진 세계를 거듭 발견할 뿐이었다. 기사는 애써 희망을 말했지만 시대가 가치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 변하지 않는 엄중한 결론이다. 포스트휴머니즘, 기후 행동, 퀴어 인권, 전해져야 한다고 믿은 움직임과 생각들은 분열적인 인터넷 세상에서 너무 쉽게 흩어지고, 왜곡되고, 희화화되며 자본화된다. 시대정신이 잠들지는 않아도 잊힐 수는 있다.

우리는 이제 현실이 조각조각 부서지고 사회가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시대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먼저 해체 이후에 다시 올 재구축의 시간을 기다리며 새로운 가치의 토대를 준비해야 한다. 가장 어두운 곳일지라도 연대는 결국 우리에게 공통된 현실의 가능성을 선물할 것이다. 우리가 떠나왔고 무너뜨린 그 탑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야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새로운 탑을 쌓아갈 것을 시도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무너진 가치가 만든 공백에서, 순간 자체의 소중함을 놓치지 말고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보자. 시대의 요구를 위해 살아가거나 시대정신에 기여하는 것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타성적 자기기만이었을지 모른다. 의무와 서사를 걷어낼 때 삶에 남는 반짝이는 순간들, 과거를 돌아볼 때 삶을 구성하는 가슴 뛰는 빛나는 순간에 가치를 부여하자. 이곳이 우리가 재구축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 곳인지도 모른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에, 아름다움 앞에 압도되는 순간에 가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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