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은 교수(음악학과)
서정은 교수(음악학과)

〈Concerts of Ancient Music〉.  18세기 영국의 음악 문화 중 하나였던 이 음악회 시리즈는 작곡 후 20년 이상 된 작품들로 레퍼토리를 구성했다. 작곡 연도가 20년만 지나도 태고의(!) 음악으로 여겨졌다는 것은 당대 작곡된 음악을 그때그때 무대에 올리는 것이 일반적인 음악회였음을 말해준다. 19세기에는 일종의 역사주의적 관점에서 이전 세기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옛 음악에 대한 연구와 연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즉 동시대 음악과 옛 음악이 공존하는 문화였다. 20세기부터는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가 말하듯 당대의 현실을 표현하는 동시대 음악을 청중들이 멀리하면서 서양음악사상 어느 때보다도 옛 음악이 음악회장을 가득 채우는 특이한 시대가 된다. 동시대를 표현하지 않기에 더 이상 삶의 본질에 가깝지 않은, 장식적 의미로 축소된 음악으로서 말이다. 여기까지는 유럽 이야기다.

우리나라의 이른바 클래식 음악 문화는 어떤 모습일까? ‘클래식’의 개념이 꼭 서유럽 음악을 지칭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은 잊힌 듯, 대부분을 우리 것도 동시대의 것도 아닌 18~19세기 유럽음악이 점유해 왔다. 그런가 하면 현대 한국 작곡가의 작품인 ‘클래식 현대 음악’ — 단어 자체로 형용모순인 — 에서는 연대로서의 클래식과 장르로서의 클래식 간 충돌이 발생한다. ‘클래식’의 여러 의미 중 ‘질적인 탁월’이나 ‘고대 그리스 문화’의 미적 개념을 빼고서도 말이다.

‘기보를 통한 작곡‒악보의 재현으로서 연주‒수동적 수용으로서 감상’으로 축약되는 음악 생산·수용의 기존 메커니즘에 이제는 다각적인 이의가 제기된다. 마치 보편적 규범처럼 받아들여졌던 이 생산·수용의 구도는 사실상 옛 서유럽 전통에서 비롯된, 명백한 시공간적 국지성을 띠는 것으로,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구속력을 가질 이유가 사실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관습화된 채 내려왔다. 이제는 작곡·작품·연주·감상의 개념, 그리고 구획된 이 범주들에 종사했던 과거의 분리된 주체들에 대해 자유로우면서 새로운 예술 행위의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공론이 특히 젊은 세대 음악인들로부터 대두된다. 창작자와 수용자 사이의 양방향 소통과 협업이 더 이상 새롭지 않은 미술·문학·영상 등 타 예술 장르에 비하면 많이 뒤처지지만, 음악에서도 실험적 시도는 이뤄지고 있다. 우리 것이 아니었으나 어느덧 고색창연해져 가는 ‘연주회장’ 문화도 이제 유일한 규범은 아니게 된 듯하다.

이제 음악계는 또 하나의 새로운 국면에 당도한다. 인공지능과 메타버스라는 거대한 키워드가 음악 분야에도 성큼 발을 들인 것이다. 이는 음악가들뿐 아니라 음악학자에게도 주요 화두로, 필자가 속한 한 음악이론학회에서는 작년 11월 ‘음악이론 지금 여기: 양식, 해석, 메타버스’라는 주제의 학술대회를, 올해 9월에는 ‘AI·메타버스 시대의 음악이론 교육’이라는 주제의 세미나를 열었다. 전통적 음악학(음악이론)에서 다루지 않던 논제들이다. 이런 새로운 변화가 음악 행위자들(agencies)에게, 또한 음악학자들에게 어떻게 적용되며 활용될 수 있을지 아직 누구도 명확한 해답을 내놓기는 어려울 것이다. 바야흐로 발 앞에 도래한 ‘생성형 인공지능 시대의 음악창작과 연주’가 음악계에 디스토피아를 가져올지, 미증유의 다양한 접근성을 열어줄지, 기대와 두려움이 공존한다.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까지, 유럽 전통과 우리 전통, 서양의 현대와 우리의 현대가 한 공간에서 어긋나는 듯 들어맞는 듯 펼쳐지는 21세기 한국의 음악 풍경. 이런 ‘불연속적 접속’의 형용모순은 어쩌면 우리의 오늘을 표현해 주는 하나의 특질일지도 모른다. ‘오늘’의 길이가 점점 짧아져 가는 이 시대, 아니 어제와 오늘과 내일 사이의 칸막이가 점점 무의미해지는 이 시대, 한국의 클래식 음악 문화는 이제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지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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