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태민(인류학과 석사과정)
주태민(인류학과 석사과정)

허기가 몰려왔다. 영화관 앞 포장마차에서 어묵 꼬치를 입에 물고는 생각한다. 방금 본 영화는 환상적인데, 꼬리처럼 달려온 이 소외감은 뭘까. 조금씩 베어 물다 이내 텅 빈 꼬치를 들고는, 이 영화가 오로지 감독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는 늦은 감상을 떠올렸다. 무언가를 잔뜩 삼켰으나 어쩐지 남겨진 것이 없다. 

환상은 현실과의 끈을 놓지 않을 때 설득력을 가진다. 예컨대 셀 수 없는 평행세계를 오가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관객의 마음을 휘어잡은 이유는 현란한 기법의 종착지가 ‘현실’ 속 ‘우리’에 고정돼 있기 때문이었다. 히어로 영화도 마찬가지다. 초현실적 설정 속에서도 우리는 현실성을 찾는다. 상처 입을 일 없는 신(神)급 히어로들에게는 이웃집 히어로에게 보냈던 열띤 응원을 보내지 않는다. 

보고 온 영화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였다. 이 작품은 두 겹의 세계가 공존하는 세계관을 가진다. 죄의식의 겉을 콕콕 두드리던 왜가리 남자는 소년을 심연으로 안내한다. 가라앉은 심연 속에는 놀랍고 다채로운 이미지가 가득하고 관념적인 상징이 곳곳에 숨어있다. 기대 이상으로 눈이 즐거운 와중, 전쟁이라는 키워드는 모험의 이미지 뒤로 가려진다. 현실과의 헐거운 접착력이, 나아가 그 현실이 ‘전쟁’이라는 점이 몰입을 방해했다. 판타지가 무너지고, 원래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을 때의 풍경은 전쟁 중임을 믿기 어려울 만큼 평화롭다. 환상에서 벗어난 곳 역시 환상처럼 느껴진다. 왜가리 남자는 심연 안에서의 일들은 모조리 잊힐 것이라 말한다. 파시스트 앵무왕도, 앵무군단도 망각한 존재로 변해있고, 전쟁은 어느새 저 너머에서 끝난다. 이 지점에서는 허탈하기까지 하다. 어느 죄의식도 사사로울 수는 없으나, 소년의 죄의식은 예상보다도 훨씬 개인적인 것이었다. 상처를 봉합한 뒤 이야기는 시대를 지나쳐 버린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절대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없겠구나. 내가 느낀 소외감은 모든 것이 너무도 ‘환상적’이기에 생겨났다. 개인의 회고에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가 싶으면서도, 전쟁을 풍경으로 삼을 수 있는 위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전쟁과 이미지, 그리고 창작자는 어떻게 배치돼야 하나.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피닉스>는 이런 고민에 힌트를 준다. 이 영화의 엔딩은 빽빽한 이미지의 반대편에 서 있다. 고요하고 비어있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넬리가 노래를 부르자 주변인들은 비로소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연주를 멈춘다. 자리를 떠나는 그녀의 모습은 고정된 앵글 속 뿌옇게 처리된다. 원래의 계획은 카메라가 넬리의 뒤를 따라가며 마무리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감독은 이것이 ‘아름다울 순 있으나, 도덕적이지 않다’라는 판단에 장면을 수정한다. “우리는 독일인이고, 이곳에 계속 머물러야 합니다. 그녀가 떠나고 흐릿해진 곳에 우리는 남아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덧붙인다. ‘이미지는 윤리적인 작업’이라고. 

상징으로 덮을 수 없는 개념들이 있다. 내게는 전쟁이 그렇다. 나의 일이 아니기에 조심스럽고, 우리의 일이기에 애탄다. ‘꿈과 망각의 기분 전환보다 더 바람직한 해방감을 가져다주는 것은 자신 주변에 일어나는 일,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라고, 카뮈는 썼다. 그 깨달음은 그의 시대가 겪어낸 전쟁의 한가운데서 이뤄졌다. 지금도 멀지 않은 곳에서 전쟁과 학살이 이뤄지고 있다. 시시각각 이미지를 통해 그들의 상황을 공유받는 사람으로서, 결국에는 그들과 시대를 공유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 순간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든 것이 흐릿하다. 그럼에도 환상보다는 증언이, 가득 찬 상징보다는 여백의 태도가 지금의 내게 더 와 닿는 방식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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