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 생애구술사에 담긴 사회적·개인적 가치를 펼쳐보다

역사책에 내 인생 이야기가 나온다면 어떨까. 여기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역사책이 있다. 교과서에 없고 자서전이나 평전과도 다른 역사, 생애구술사다. 생애구술사에서는 보통의 사람들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보통 사람들 이야기, 생애구술사

생애구술사란 동시대 사람들이 구술한 생애를 기록하는 일 또는 그 역사 기록물이다. 구술자가 삶의 경험을 이야기하면 기록자는 이를 영상이나 글로 남긴다. 생애구술사는 미시사 연구의 한 방법으로, 거시사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특정 분야·인물·사건을 세세하게 탐구하기 위해 활용된다. 한국구술사연구소 권희정 연구원은 “생애구술사는 개인의 경험과 서사를 통해 그동안 기록되지 않은 부분을 채워 역사를 완성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에 근현대사에서 지배층에 의해 숨겨진 진실을 밝히기 위해 생애구술사 연구가 시작됐다. 당시 생애구술사는 주로 위안부 피해 여성, 한국 전쟁 생존자, 민주화 운동 참여자의 경험을 다뤄, 거대 권력의 횡포를 드러내는 데 활용됐다. 권희정 연구원은 “2000년대 초반에 들어서는 도시와 중앙정부에서 소외된 지방과 마을의 모습을 기록하기 위해 주민의 생애담을 듣는 작업이 이뤄졌다”라며 “이후 노인, 어린이, 여성,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삶에까지 관심이 이어졌다”라고 밝혔다. 최근에는 생애구술의 주체가 더 넓어지면서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생애구술 사업이 지역 곳곳에서 활발하다. 권희정 연구원은 “사회적으로 큰 사건을 겪지 않아도, 특정한 계층에 속하지 않아도 누구나 생애구술의 주체가 될 수 있다”라고 전했다.

 

지역 곳곳을 깊숙이 보여주는 돋보기가 되다

한 사람의 생애담은 그가 살았던 시대와 공간을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보여주기에 지역사에 중요한 사료가 된다. 예컨대 제주학연구센터는 사라져가는 제주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생애구술사를 활용해 제주학 아카이브를 만들고 있다. “물때 점점 늦어나진다 헤 어기야차…” 제주학연구센터가 수집한 해녀박물관의 『제주해녀사료집』에 나오는 해녀 노래다. 이처럼 해녀의 삶에는 제주 바다의 생태계와 물질 요령, 물질에 사용하는 해녀 용어, 어촌의 규율 등이 녹아있다. 제주방언 전문가인 제주학연구센터 김순자 센터장은 “소멸 위기에 처한 제주어를 기록으로 남기는 데에 생애구술사가 특히 유용하다”라고 말했다.

관악구는 2021년 서울시 자치구 중 최초로 여성 생애구술사 사업을 시작했다. ‘관악 Her Story(허 스토리)’에서는 관악구가 발전하는 과정에 여성이 기여한 바를 여성의 손으로 기록해 해마다 책을 발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산업화로 빠르게 변하면서 잊히는 마을의 모습과 관악구 여성의 생활상이 후세대에 전해진다. 올해 프로그램에 참여해 1945년생 박모 씨의 생애를 기록한 임다윤 씨(재료공학부·19)는 “2년 반 동안 청룡동에서만 살아 관악구 안 다른 동네를 잘 몰랐는데, 구술자 분께서 삼성동과 난곡동에서 반세기를 살아오신 이야기를 들으며 관악구 구석구석을 깊이 알게 됐다”라고 전했다. 대화에서 박모 씨는 수십 년 전 기억 속 지도에 있는 건물 이름을 사용했다. 지금은 위치가 달라진 곳이다. 삶의 역사가 녹아있는 주민의 언어에는 그가 터전으로 삼았던 동네의 옛 풍경이 살아 숨 쉰다.

 

삶의 의미 찾고 상처 어루만져

생애구술사는 그 기록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주기도 한다. 우선 구술자는 자기 생애를 설명하고 그 기록을 마주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고 미래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 종로문화재단에서는 극단 ‘대학로愛(애), 대학로人(인)’과 협업해 2020년부터 종로구 어르신의 영상자서전을 만들고 있다. 종로문화재단 이민정 문화기획부장은 “출연하는 어르신 대부분이 지난날을 열심히 살았음에 자부심을 느끼신다”라고 전했다. 청년들은 생애구술을 통해 살아갈 의지를 다지기도 한다. 사단법인 ‘우리들의성장이야기’에서는 성북구청과 함께 3년 전부터 청년생애구술사 ‘골든타임’ 사업을 운영 중인데, 주로 은둔·고립 청년이 구술자가 된다. 우리들의성장이야기 정미현 사무국장은 20대 A씨가 자신의 생애 기록을 읽고 사소하다고 여겼던 순간이 생각보다 의미 있는 기억임을 깨달았다고 했다는 후기를 전했다. 세상과 벽을 쌓았던 젊은이들이 자기 인생을 새로운 시선에서 바라보고 삶의 의미를 찾고 있다. 

구술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아픈 기억을 꺼내놓으며 스스로 상처를 치유한다. 김순자 센터장이 만난 한 구술자 어르신은 면담이 끝나고, 시어머니가 왜 그렇게 자신에게 모질었는지 이제 조금 알겠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 묵혀뒀던 시집살이에 대한 애환을 처음으로 입 밖에 꺼낸 후 그동안 원망했던 시모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2020년 ‘골든타임’ 프로그램에 구술자로 참여한 북한이탈청년 B씨는 기록자 정미현 사무국장에게 탈북하고 남한에 적응하기까지 경험을 털어놨다. 대화가 끝나고 그는 말하는 것만으로 힐링이 됐다고 전했다.

생애구술사는 기록자가 자기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2022년 ‘골든타임’ 프로젝트 기록자인 30대 작가 정담아(필명) 씨는 구술자로 20대 C씨를 만났다. C씨가 생애담과 함께 털어놓은 고민을 듣고 정담아 씨는 자신이 과거에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지금은 걱정을 했었다는 사실조차 잊었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심각한 문제였다”라며 “힘겹기만 했던 순간이 현재의 나를 있게 한 성장통이었음을 깨달았다”라고 돌아봤다.

 

숲이 아닌 나무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생애구술사는 커다란 나무 그늘에 가려 있던 보통 사람과 지역의 나이테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누군가 때때로 그 굴곡을 알아봐 주는 것만으로 오랜 시간 아물지 않았던 상처가 낫기도 한다. 우리 동네, 우리 가족, 내 이야기로 만들어진 역사만이 갖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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