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박재아 기자 0204jaea@snu.ac.kr
삽화: 박재아 기자 0204jaea@snu.ac.kr

얼마 전 아내에게 물었다. “왜 나랑 결혼했어?” 아내가 답했다. “퇴근하고 같이 밥 먹고 싶어서.”

아내와 가족을 이루고 함께 살면서 크게 변한 것 중 하나는 요리를 더 자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녁마다 사랑하는 사람과 얼굴을 보고,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포옹할 수 있는 행복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인류가 때때로 누려왔던 것이다. 

이런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까닭은 직접 요리를 만들고 함께 나눠 먹을 수 있는 적당한 넓이의 부엌과 식탁이 있어서기도 하다. 운이 좋게도 나는 학교와 가까운 가족생활관에서 생활하는 혜택 덕에 부담되지 않는 가격으로 이런 것들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2019년, 미국 UCSD 사학과 토드 헨리 교수는 서울대에 방문하면서 가족을 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서울대의 BK국제관 측이 그의 파트너를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거주하는 가족생활관도 입주 요건을 ‘기혼자’로 한정하고 있어 한국의 법적 현실상 성소수자 커플은 입주가 어렵다. 집 앞에는 작은 놀이터와 어린이집도 있지만, 혼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나 싱글대디도 들어올 수 없다. 어떤 가족은 ‘가족’으로 인정받는 반면, 어떤 가족은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할 때, 혜택은 특권처럼 변한다. 

강릉원주대 다문화학과 김지혜 교수는 『가족각본』에서 우리가 가족이라는 ‘견고한’ 각본을 연기하면서 살아가는 것 같다고 포착한다. 우리는 딸처럼, 아들처럼, 언니나 동생처럼, 아내처럼, 남편처럼, 어머니처럼, 아버지처럼… 이라고 주어진 사회적인 각본을 연기한다. 때로 ‘잘못’ 연기했을 때는 주변의 시선과 질책을 받거나, 심지어 경계 바깥에 놓이기도 한다. “너는 자식이 태도가 그게 뭐야!” “애는 집에서 엄마가 키워야지.” “어떻게 며느리가 남자야!”

그러나 이런 각본은 결코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라는 무대에 다른 각본을 연출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퇴근하고 같이 밥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살결을 어루만질 수 있다. 그중에 어떤 ‘우리’들의 성별이 같든, 다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일까? 그런 다른 연출들 속에, 견고해 보이던 각본들은 수정되기도 한다. 올해 2월, 건강보험에 있어서 동성부부를 가족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2심 판결이 있었다. 여성이 아이를 돌보기 위해 집에만 있어야 한다는 발언은 아주 명백하게 시대착오적인 것이 됐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가족은 너무나도 비싼 것처럼 돼버렸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가족 각본이 낡고 현실에 맞지 않고 삐걱거리며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우리가 연기하는 가족 각본을 뒷받침해 줄 인프라가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족생활관 같은 시설은 턱없이 부족하고 단기적이고, 다양한 모습으로 가족을 꾸리며 살아가고 또 살아가고픈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선별적이다. 누가 됐든 우리가 선택한 다른 누군가와 하루 일과를 마치고 같이 밥 먹을 수 있는 사회, 그것이 모든 가족과 인구 정책의 시작일 테다.

강승 간사 

kang9309@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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