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섬 전임의(서울대병원 신경외과학교실)
김섬 전임의(서울대병원 신경외과학교실)

직장을 연건동으로 옮긴 후 나의 소소한 즐거움은 출근길 지하철에서 조간신문을 읽는 일이다. 얼마 전 접한 기사는 최근 이직과 사직이 과거에 비해 일상적이며 평생직장은 사라졌다는, 변화한 직업관에 관한 기사였다. 기사를 골몰히 생각하며 혜화역으로 가기 위해 4호선으로 환승했는데, 멀리서 익숙한 백발의 노신사가 보였다. 그는 내가 속해있는 척추신경외과의 C교수로, 척추신경외과 분야에 평생을 정진하며 국내외로 존경받는 의사이자 학자다. 군 복무 시절과 해외연수를 제외하고는 한 직장에서만 의사 생활을 하고 있는 그의 새벽 출근길은 나보다 즐거워 보였다. 

퇴임을 앞둔 그가 마지막 집도를 마치고 수술방을 나서는 뒷모습은 아직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평생을 정진한 마지막 결실이 저리도 달콤한 것일까. 제자들에게 “이제 나 대신 고생들 하시게”라는 말과 함께 껄껄 웃으며 홀가분하게 떠나는 그를 보니 문득 출근길에서 봤던 기사가 떠올랐다. 

기사는 변화한 직업관을 소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인내하기보다는, 세상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게 하는 ‘포기할 용기’에 대해 동조하는 글이었다. 나 역시 고된 수술 이후 아픈 어깨와 목을 부여잡고 의사 생활을 포기해야 할 정당성을 매일같이 고민했기에 그 글귀가 솔깃했다.

우리는 어떤 결과물을 얻기 위해 일정 기간의 과정을 인내하는 것은 힘들고 행복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반대로 이것을 견뎌 냈을 때 그 일련의 과정들이 자신을 더 강하고 크게 만든다는 것도 알고 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는 트로이전쟁 이후 귀향하는 오디세우스의 이야기가 나온다. 오디세우스는 고향으로 돌아가며 갖은 시련을 겪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그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오디세우스는 한층 성장해 고향으로 도착하게 된다. 

내가 생각하는 ‘직업’은 오디세우스의 여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직장에서는 분기마다 해결해야 할 프로젝트와 맞닥트리고, 교육기관에서는 끊임없이 학생들에게 각종 평가와 시험을 치르게 한다. 이런 크고 작은 과정을 포기하지 않고 완수했을 때 진급을 하고, 학년이 올라간다. C교수 역시 학생 시절 수많은 시험을 통과했어야 했을 것이고, 의사가 돼서는 인턴‒전공의‒전임의 과정을 견디며 교수가 됐을 것이다. 그가 집도한 모든 수술이 완벽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모든 환자의 경과가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의사로서 크고 작은 과제를 완수하며 결국 지금의 위치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 나의 포기할 욕망은 C교수를 보며 사그라들었다. 

이제 올해의 후반기에 접어들었다. 한 해를 잘 버티고 학년이 올라가는 학생들을 칭찬해주고 싶다. 한 해를 견뎌낸 모든 직장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아무리 짧은 기간이어도, 아무리 미흡한 결과여도 포기하지 않고 일정한 과정을 견뎌낸 사람은 누구나 박수받아야 하고 그다음에 따라오는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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