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 | 제62회 대학문학상 문학·영화 평론 부문 수상자 기고

문성효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문성효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저는 시를 공부하는 사람이지만, 오늘은 노래 이야기를 할 겁니다. 가사를 음미하다 보면 시처럼 느껴지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잔나비의 노래를 다룹니다. 잔나비의 노래에서는 어떤 사랑과 상처가 들리는데, 그것들은 시(詩)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나는 읽기 쉬운 마음이야

당신도 스윽 훑고 가셔요

달랠 길 없는 외로운 마음 있지

머물다 가셔요

내게 긴 여운을 남겨줘요

사랑을 사랑을 해줘요

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새하얀 빛으로 그댈 비춰 줄게요

그러다 밤이 찾아오면

우리 둘만의 비밀을 새겨요

추억할 그 밤 위에 갈피를 꽂고 선

남몰래 펼쳐보아요

나의 자라나는 마음을

못 본 채 꺾어 버릴 수는 없네

미련 남길 바엔 그리워 아픈 게 나아

서둘러 안겨본 그 품은 따스할 테니

 

— 잔나비,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발췌, 《전설》, 2019.03.13.

 

잔나비의 노래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와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노래에서 자꾸 ‘마음’이라는 표현을 쓴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를 보면 “나는 읽기 쉬운 마음이야”, “달랠 길 없는 외로운 마음 있지”, “나의 자라나는 마음을 못 본 채 꺾어버릴 수는 없네”처럼 ‘마음’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외로운 건 외로움이라고, 사랑하는 건 사랑이라고 노래할 수는 없었을까요?

저는 ‘마음’이라는 개념에 담긴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마음’은 어쩌면 ‘감정’과도 다른 것 같습니다. 조금 무리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감정’이 보편적인 문법으로 재단하려는 혹은 재단해 버린 어떤 것이라면, ‘마음’은 그렇게 재단되기 어렵거나 그러지 못한 개인의 무언가를 가리키는 개념이 아닐까요? 적어도 잔나비의 노래에서는 그렇게 느껴집니다. “읽기 쉬운 마음”이라는 것은 읽는 행위 자체가 쉽게 이뤄지는 마음일 뿐이지, 읽어서 알기 쉬운 마음은 아닙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읽는 일이란 대개는 “스윽 훑고 가”는 것에 불과하니까요.

“가셔요”에서 쓰인 종결어미 ‘-어요’는 설명과 청유의 의미를 동시에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도 스윽 훑고 가셔요”는 당신도 스윽 훑고 갈 뿐이라는 사실로 읽히기도 하고, 당신도 스윽 훑고 가달라는 부탁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를 스윽 훑고 갈 뿐인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윽 훑고 가는 일조차 간절히 부탁하는 우리 각자에게는 그만큼 달래기 힘든 외로운 마음이 있습니다. 외로움은 달래면 그만인데, 외로운 마음이 있다고 하니 무엇이 왜 외로운 것인지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머물다 가”는 사람이 나타나서 그것을 이해해 주기를 꿈꾸게 됩니다.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 글을 쓰는 저도 사랑을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긴 여운”으로나마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여운’이란 어떤 일이 끝나고 나서도 아직 가시지 않은 느낌을 말합니다. 그래서 여운은 애틋하지만 애처롭습니다. 그리고 이 둘을 묶어서 애잔하다고 말합니다. ‘나’는 사랑받고 싶은 사람이면서도(“사랑을 사랑을 해줘요”), 사랑하고 싶은 사람입니다(“새하얀 빛으로 그댈 비춰 줄게요”). 사랑하고 싶다는 말과 사랑받고 싶다는 말은 잘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도 애잔한 이유는 둘을 구분하기가 참 어려워서인 듯합니다.

“긴 여운”으로는 느껴지는데 그 실상을 알기 어려운 사랑은 “마음”의 지평에 머무릅니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그것은 분명하게 보이기 이전에(“못 본 채”) 벌써 “자라나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 마음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미련”을 남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워” 아파하는 것입니다. ‘미련’은 일을 시작조차 하지 못해서 남는 마음이니, ‘여운’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감행해야 합니다. 설령 나중에 그리워 아파하게 되더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과연 사랑인지 아닌지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여운’이 사랑을 인식하는 방식이라면, 그렇기 때문에 “서둘러” 안기는 것은 사랑을 시작하는 방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꿈의 실체를 알 수 없지만, 그 실체를 가지기 위해서는 꿈을 꿔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은 마음처럼 다가왔다가 마음처럼 지나가기 때문에 어려운 것 같습니다.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를 읽으며 사랑 이야기를 해봤다면,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을 읽으며 상처 이야기도 해봅시다.

 

그땐 난 어떤 마음이었길래

내 모든 걸 주고도 웃을 수 있었나

그대는 또 어떤 마음이었길래

그 모든 걸 갖고도 돌아서 버렸나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 없지만

또다시 찾아오는 누군갈 위해서

남겨두겠소

 

— 잔나비,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발췌, 《MONKEY HOTEL》, 2016.08.04.

 

이 노래에서 ‘마음’은 “어떤 마음”이라고 자주 표현됩니다. 앞서 그런 이야기를 했었지요. 사랑을 꿈꾸면서도 그것을 잘 모르기 때문에 서둘러 안기는 것 같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긴 여운을 남길 때 우리는 사랑을 인식하고 또한 회상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사랑을 인식한 다음에 그것을 회상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어떤 마음을 회상하면서 사랑을 인식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받으려는 마음이 표면적으로 갈라서는 순간에 우리는 회상을 시작하는 게 아닐까요. 내 마음이 그 사람의 마음과 달랐다는 사실에서 오는 ‘상처’가 우리를 회상의 굴레로 밀어 넣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마음이지만, 마음은 오직 말과 행동으로만 드러나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어떤 무언가를 느끼는 것만이 사랑이라는 관념과 함께,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만이 사랑이라는 관념도 굳건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마음”을 회상한다는 것이 사실은 어떤 말과 행동을 처절하게 해석하는 일과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노래 속에서 ‘나’가 “어떤 마음”이었길래 “내 모든 걸 주고도 웃을 수 있었”는지, “그대”는 “어떤 마음”이었길래 “그 모든 걸 갖고도 돌아서 버”릴 수 있었는지 생각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오직 “볼품” 없이 “남은” 것으로만 사랑과 사랑 아닌 것을 구별해야 하는 슬픔을 그려낸 것 같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의 삶에 가장 깊숙한 상처는 영원한 해석을 요구하는 사랑인 것 같습니다. ‘나’의 마음은 사랑이었는데 ‘그대’의 마음은 아니었다면 그렇게 생각하고 다음 사랑을 찾으면 됩니다. 하지만 ‘나’의 마음이 사랑이었는지, ‘그대’의 마음은 아니었는지 의문스러워지면 사랑이라는 관념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이 노래에 그려진 회상이 슬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사랑 자체의 부재보다도 사랑이라는 관념의 흔들림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은 건 볼품 없”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볼품이 없다는 것은 딱히 볼 게 없다는 뜻인데, 뒤집어 해석하면 너무 잘 보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했고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여름날은 볼품없이 초라한 것이지만, 그렇기에 명백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치명적인 내상(內傷)보다는 눈에 잘 보이는 흉터가 앞으로 사랑하기에는 낫습니다. 아니, 살아가기에는 낫습니다.

사랑과 상처는 항상 우리를 어딘가에 오래 머무르게 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시(詩)를 오래 읽는 일과 비슷합니다. 시를 오래 읽는 이유는 그 속에서 우리 자신의 사랑과 상처를 발견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행복이 일단락되면 오래된 노래가 다르게 들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모든 걸 주면서 웃었던 어떤 마음과 모든 걸 가지고도 돌아서 버린 어떤 마음을 생각하는 마음에게 이 글을 남깁니다.

 

 

 

삽화: 박재아 기자

0204jae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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