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리

강연하


1교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을 때 예리는 교실을 뛰쳐나와 체육도구실로 향했다. 수만 번의 앞구르기 뒤구르기들이 토해놓은 체취와 분비물로 범벅된 매트 위에 예리는 벌러덩 누워버렸다. 
지난밤의 사건이 끈적한 거미줄처럼 드리워졌다. 꽉 닫힌 다른 사람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들이밀고 헤집던 느낌을, 그날 이선형이 내뱉은 한마디를 들은 후 뱃속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르던 기묘한 감정을, 예리는 더 이상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짧게 줄인 교복에 맞지 않을 만큼 희한하게 길어져 버린 팔과 다리, 그만큼 자라지 못해서 몸에 비해 짧은 목, 눈썹 사이 뾰루지 몇 개. 땀에 절어 매트에 찐득하게 붙어버린 살갗과 벗어 던져버리고픈 치마 속 속바지. 예리는 누군가 공중 부양해서 흐트러진 교복 속 자기 몸을 훑어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치 영화를 찍는 카메라가 한 인물의 눈이 되어 집요하게 소녀의 몸을 훑어 내리고 탐닉하듯이. 
그 눈이 지난밤 이후 예리에게서 떠나지 않는 이름 모를 감정까지도 알아챌 수 있을까. 온몸을 적시며 흘러내리는 땀방울과 함께 6월의 기억들이 매트 위로 조금씩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오늘부터 교생 선생님 오시는 거 알지? 너희들 부담임으로 3주 동안 계실 거야. 학교생활 잘 도와드리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알았지?”
한 달 전 담임이 모두를 둘러보며 이렇게 말할 때, 예리는 요셉과 책상 밑으로 손장난을 치고 있었다. 요셉이 예리의 손을 잡으려고 하면 예리가 자꾸 손을 멀리 보내고 모른 척했다. 도망가지 못하게 팔이 꽉 잡히면 예리는 아프다고 하면서도 팔꿈치를 더 요셉의 허리에 밀착시켰다. 그러면서 요셉을 쳐다보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장난스럽게 웃었다. 
예리는 요셉이 자신에게 얼마나 푹 빠졌는지 잘 알고 있었다. 중학교 2학년이 되자 전학생이었던 작년과는 달리 많은 남자애들이 예리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남자애들이 좋아해서 안달 내는 그 상태를 예리는 좋아했다. 생리통 때문에 울고불고 비명을 질렀고,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징그러워하기도 했다. 교복치마를 한 단 두 단 접어 올리고, 남자애들 무릎 위에 앉아보기도 했다. 예리는 벚꽃잎 흩날리듯 끊임없이 떠다니며 봄날을 만끽했다. 인기 많은 여자애로 군림하는 순간의 긴장을, 그 아슬아슬한 맛을 예리는 깨달아가고 있었다. ‘적당한’ 수준을 벗어나 가슴이 너무 커지거나 너무 도도해지거나 너무 유순해진다면, 이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그 적당한 선 안에서 예리는 맘껏 요셉을 밀고 끌어당겼다. 아직 공식적으로 사귀기 전이었지만 요셉은 벌써부터 예리 내 거라고, 내 여자라고, 건드리는 새끼 있으면 죽여 버릴 거라고 떠들고 다녔다. 많은 여자애들이 그런 요셉의 말이 멋있다고, 남자 같다고, 부럽다고 소곤댔지만 사실 예리는 그런 말을 내뱉을 때의 요셉이 좀 같잖다고 생각했다. 
가지긴 누가 누굴 가져.
다만 요즘 요셉의 몸에 자신의 몸이 닿으면 배꼽 밑이 찌릿했다. 특히 요셉이 팔뚝 살 안쪽이나 목덜미 뒤를 슬쩍 만지면 ‘더, 더, 조금 더’를 원했다. 가끔은 허벅지 안쪽, 특히 소변이 나오는 부분에 가까운 그 안쪽이 미친 듯이 간지러운 것 같으면서 저린 것 같기도 했다. 예리는 이 느낌의 정체를 밝히고 싶었다. 

수업 전 예리는 화장실에서 혼자 좋아하는 아이돌의 음악을 들었다. 오늘은 아마 요셉과 정말로 손을 잡게 될 것이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동시에, 손잡은 이후에는 어떤 대단한 것이 남아 있을까 궁금해졌다. 내 마음이 이리 다채로운지 몰랐다고 말하는 노래 가사가 오늘따라 유난히 귀에 박혔다. 
요셉의 몸이 닿으면 좋은데 그 사람이 꼭 요셉이어야만 할까?
꼭 요셉이어야만 한다면, 나는 걔랑 같이 다채로운 마음을 느낄 수 있을까?
예리는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갔다. 
누군가 세면대 앞에 서 있었다. 블랙 정장 바지에 화이트 블라우스. 옷의 어떤 부분도 몸에 과하게 붙지 않았지만 마르고 날렵한 어깨와 등과 엉덩이의 실루엣이 드러나는 옷차림이었다. 여자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재빠르게 훑어본 예리는 조금 떨어진 세면대로 가서 섰다. 손을 씻으며 거울 너머로 여자의 얼굴을 흘낏 보았다. 옷차림과 닮은 얼굴이었다. 화장을 하지 않았지만 선이 또렷한 눈매, 립밤 정도만 발랐을 것 같은 연한 분홍색 입술. 
예쁘다. 누구지? 학교에선 본 적이 없는데. 애들 엄마는 절대 아니야. 너무 젊어 보이잖아.
예리가 비누 거품을 내며 한참 손을 씻는 동안 여자는 중단발 길이의 머리를 틀어 올려 하나로 묶었다. 그 모습을 보니 예리도 치렁치렁 늘어뜨린 긴 머리를 묶고 싶어졌다. 교복 치마 주머니에 손을 넣어봤지만 늘 그렇듯 까만 머리끈은 막상 찾아 쓰려면 사라지고 없었다. 그때, 여자가 고개를 돌려 예리를 보았다. 
“이거 써.”
텅 빈 화장실에 목소리가 울렸고, 예리는 여자가 내민 손을 보았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까만 고무줄 하나가 걸려 있었다. 잠깐 망설이다가, 여자에게 다가갔다. 고무줄을 주고받는 둘의 손끝이 살짝 스쳤다. 별일 아니었는데,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는데 검지와 엄지와 손톱 끝이 맞닿았다 떨어지던 그 순간 예리는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아버렸다. 왜인지 모르지만 온몸이 간지러웠다. 교실과 복도가 한창 시끄러울 시간인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여자는 뒤돌아 빠르게 걸어갔다. 예리가 우두커니 서서 머리를 높게 올려 묶는데, 문을 열고 나가려던 여자가 말했다. 
“머리끈은 가져도 돼. 머리 묶으니까 예쁘다.”
문이 닫혔다. 예리는 그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천천히 머리를 묶으며 거울 속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교실 뒷문을 열었을 때 이미 수업은 시작된 후였다. 담임은 늦게 들어오는 예리에게 눈을 흘겼지만, 벌점을 주거나 혼낼 시간은 없었다. 예리 또한 담임 옆에 서 있는 사람을 보느라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조금 전의 그 여자였다. 그 여자가, 담임 옆에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우리 교생이래. 옆 반 늙은 국어 대신 수업 들어온대.” 
요셉이 말했다. 예리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교생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요셉은 마침내 예리의 손을 잡아챘다. 둘의 손이 하나로 포개지던 그 순간, “안녕하세요. 이선형이라고 합니다. 영이 아니고, 형. 분당중학교 2학년 1반 친구들 만나서 반갑습니다.”라고 여자가 말했다. 남자애들이 책상을 주먹으로 쾅쾅 치며 괴성을 질렀다. 요셉은 예리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깊숙이 밀어 넣었다. 요셉의 얼굴에 뿌듯함이 넘쳐흘렀다. 예리는 두 볼을 살짝 붉히며 웃는 것을 잊지 않았고 손가락을 접어 요셉의 큰 손 위에 선명히 돋은 핏줄을 하나하나 만져보았다. 깍지 낀 손은 책상 밑에 숨겨져 있었지만, 예리는 이선형이 이 모습을 봤을까 궁금했다.

그 날 학생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교생에 대한 평가가 진행되었다. 남자애들은 이선형이 3반 교생에 비해 덜 귀엽게 생겼지만 피부가 좋고, 5반 교생처럼 돼지 같지 않고, 나대지 않아서 좋다고 평했다. 여자애들은 수십 가지의 다른 분홍색 틴트들을 책상 위에 늘어놓고 서로의 입술에 발라주며 학교에 화장 안 하고 오는 여자 선생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예리 친구 은혜는 복도에서 욕하며 울었다. 원준이 자기 가슴을 콱 움켜잡고 주물럭거리고 도망갔기 때문이었다. 원준에게 밀리고 싶지 않았던 태진은 시은의 교복 치마 속 가랑이로 짐작되는 부분을 더듬어 만졌고 “와, 씨발 내 텐트 섰다!” 소리를 질렀다. 채연은 아이패드로 ‘분당에 있는 모 중학교 이게 실화냐… 남자애들이 유튜브에서 본 거 그대로 따라하는데 미친 것 같다’고 트위터에 썼다. 은지와 수민은 유명 팬픽 사이트에 들어가 좋아하는 아이돌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야한 팬픽을 몰래 읽으며 킥킥댔다. 누군가는 열심히 영어 문제집을 풀기도 했고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기도 했다. 
예리는 어디에도 끼지 않았다. 이선형은 자꾸만 예리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요셉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관심을 가지는 자신이 신기하기도 했고 혼란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대상에 대한 혼란보다는 이 순간 느끼는 호기심과 쾌감이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 종례 시간, 담임은 다음 주 월요일 창의적 체험활동 두 시간 동안 선형 선생님과 일대일 진로 상담이 있을 예정이라고 했다. 주말 동안 상담 받고 싶은 내용을 생각해오라는 말도 덧붙였다. 예리는 이선형에게 특별한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다른 여자애들, 그러니까 쉬는 시간마다 교무실에 단팥빵이니 딸기우유니 하는 것들을 사 들고 찾아가서 대학 생활 얘기해달라고 조르는 어린애들과 자신은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예리에게 이것은 월요일의 중대한 목표가 되었다. 
하지만 왜? 왜 나는 그 교생 쌤을 이토록 신경 쓰는 걸까?

일요일 밤 예리는 분당 정자역 학원가의 영어학원에서 수업을 마친 후 홧홧한 가슴을 안고 동네를 뱅뱅 돌았다. 반듯하게 구획된 이 신도시 부촌 아파트의 가족들에게는 암묵적인 법칙이 있었는데, 그것은 궁궐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단 두 블록 떨어진 모텔촌 골목을 무조건 피해 다니는 것이었다. 전철역에서 가장 빨리 아파트로 오는 지름길인데도 그랬다. 처음 이사 왔을 때부터 예리는 그곳이 궁금했다. 집 옆에 버젓이 존재하지만 모두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장소처럼 여기는 곳.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뻔히 알지만 엄마 아빠 앞에서는 모른 척해야 하는 그 곳의 음습한 공기를 일부러 마구 들이마시며 예리는 집으로 향했다. 
예리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엄마 정미연은 “우리 딸 왔어?” 하며 과일 접시를 내어주었다. 엄마가 뭐라고 말했지만 예리는 대강 응, 대답하고 방문을 닫았다. 
분홍색 침대 시트 위에 새 교복 치마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정미연은 자주 새 치마를 사다가 침대에 두었다.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예리가 치마를 줄여 입으니까 짧은 치마를 버리고 새 치마를 준비해두곤 했다. 처음에는 예리도 짜증을 내며 대들었지만 이제는 이것이 엄마의 습관일 뿐임을 알고 있었다. 
예리는 새 교복 치마를 입어보았다. 역시나 너무 길고 넉넉하고 멋이 없었다. 자기가 아닌 것 같았다. 더 나빠지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요셉을 생각하면서 눈을 감았다. 요셉의 팔이 허리를 감았을 때처럼 왼손을 들어 오른쪽 옆구리에 대고 쓸어내렸다. 또다시 배꼽 아래 스위치 하나가 탁, 하고 켜지면서 몸 안에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다. 몇 번이고 쓸어내리며 그날 스쳤던 이선형의 길고 섬세한 손가락 생각도 했다. 축축한 혓바닥을 내밀어 다시 한 번 입술을 적셔 보았다. 이래도 되는 걸까, 엄마나 아빠가 갑자기 문 열고 들어오면 뭐라고 말해야 하나, 싶었지만 한없이 이 순간이 지속되기를 원했다. 

월요일 오후, 예리는 상담실에 들어가 이선형 맞은편에 앉았다. 이선형은 예리와 화장실에서 있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상담 내내 수업 시간에 하듯 차분한 말투로 중학생 진로 상담 매뉴얼에 적혀 있을 말들을 읊었다. 예리는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이선형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동시에 막무가내로 털어놓고 싶기도 했다. 
남자애들이 신처럼 떠받드는 유튜버 봉구가 여자애들은 구멍이라고 했대요.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못 들은 척, 쿨한 척 하는데 이게 맞아요 쌤? 
나는 끝까지 가보고 싶은데 그게 어딘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모르겠어요. 쌤은 알아요? 
“쌤.”
“응, 얘기해.”
“쌤 중학교 다닐 때도 교생 쌤 있었어요?”
“있었지. 왜?”
“그때도 지금처럼 쌤들 수업하는데 애들끼리 DDR 치냐는 쪽지 주고받고 그랬어요?”
“DDR? DDR이 뭔데?”
“쌤 진짜 몰라요? 남자애들이… 그거… 하는 거요. 그거. 쌍디귿으로 시작하는 거.”
“글쎄…… 그런 것까진 잘 기억이 안 나네. 첫사랑 얘기는 물어봤던 것 같아.”
“쌤 예뻐서 남자애들이 그런 얘기 하는 거래요.”
“이런 얘기는 예리의 진로와는 아무 관계없는 것 같은데?”
“근데 3반 교생 쌤은 아까 울었대요. 애들이 손가락으로 계속 구멍 만들고 그래서. 쌤도 DDR 얘기 같은 거 들으면 상처받고 막 그래요?”
“사실은 예리가 상처받는 거 아니야?”
“…아닌데요?”
“예리는 어떤 일이 적성에 맞을 것 같아?”
“쌤, 왜 화장 안 해요?”
“예리는 쉬는 시간마다 화장 잘하던데, 그쪽으로 관심이 있어?”
“저는 쌤한테 관심이 있어요.”
“관심 가져줘서 고마워. 선생님도 예리가 앞으로 하고 싶은 공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에 관심 많아.”

결국 얼마 가지 않아 예리에게 할당된 상담 시간이 끝나 버렸다. 상담실에서 나와 하굣길에 엄마 차를 타고 국어학원에 도착할 때까지, 예리는 자신이 이 일대일 대면에서 대체 무엇을 기대했었는가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이모도 아줌마도 아닌 성숙한 여자 어른이자 언니 같은 쌤에게 ‘넌 뭔가 달라’라는 말을 듣고 싶었을 수도, 그 쌤이 자신의 도발에 흔들려 선생답지 못한 말이나 행동을 해주길 원했을 수도 있었다. 물론 이선형의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을 다시 한 번 만지고 싶었고, 또…… 또 다음으로 무엇을 더 하고 싶었을까? 
예리의 상상은 강제로 멈춰질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아는 것이 없으니 상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자신의 연기에 심취하여 이 장면을 계속 끌고 나가고 싶은데,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컷!’ 소리를 들어야 하다니 억울했다. 엄마를 뒤로 한 채 차에서 내리며 예리는 어쩌면 자신의 몸과 마음이 멋대로 고동치는 소리를 이선형이 알아주고 들어주기를 바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로지 이선형만이 할 수 있는 일일지도, 그럴지도 모른다고. 
왜 쌤은 내가 오히려 상처받는 거 아니냐고 물었을까.
DDR을 치고 구멍을 만드는 한복판에서 어째서 쌤 말고 내가 상처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예리는 상처받는 여자애로 스스로를 자각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이 학교에서 상처 받을 일 따위는 생기지 않을 거라고, 상처를 받기 이전에 뛰쳐나가 먼저 한 방을 먹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믿어야만 했다. 

안팎으로 시끄러운 몸을 이끌고 예리가 국어 단과반 강의실에 도착했을 때, 은지와 수민이 맨 뒷자리에서 손을 흔들어댔다. 
“재밌는 거 찾았어!”
예리가 옆자리에 앉자마자 은지가 속삭였다. 세상에는 야한 남자 아이돌 팬픽만 있는 줄 알았는데 여자들끼리 나오는 것도 있었다고, 그중 제일 센 걸로 가져왔다고 했다.
“너 언제부터 이런 거 좋아했어?”
“이런 거?”
“여자애들만 나오는 얘기.”
“오늘부터? 원래 팬픽은 욕하면서 읽는 거야.”
예리는 은지의 태블릿을 책처럼 펼쳐두고 읽어나갔다. 국어 수업이 시작됐지만 예리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입술로 한껏 달아오른 유두를 오물거릴 때…’
그 이상한 글은 첫 페이지부터 예리의 눈을 사로잡았다. 글자들은 예리를 기다렸다는 듯 끝도 없이 이어졌다. 
‘나봄이 손가락으로 살살 매만지면 주은이 몸을 비틀며 고양이처럼 새된 신음을 흘렸다.’까지만 해도 예리는 눈앞에 펼쳐진 이 풍경과 데면데면했다. 헐떡거린다, 숨이 짧아지고, 컥컥대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는 부분에서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기도 했고 저릿저릿한 것 같기도 했다. 붕 떠오르는 것 같기도, 저 밑바닥으로 한없이 가라앉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날 밤 예리는 콘텐츠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아이돌 팬픽을 탐독했다. 인터넷 강의를 결제할 때 쓰는 엄마의 주민등록번호로 ‘19금’ 딱지가 붙은 글들만을 다운로드받아 읽고 또 읽었다. 예리는 자신이 남자 아이돌 팬픽과 여자 아이돌 팬픽을 가리지 않는 취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교재로써의 포르노그래피를 성별과 장르 구분 없이 한껏 볼 수 있다니 예리에게 이 순간 이보다 더 흥분되는 발견은 없었다. 다양한 욕망과 체위로 폭주하는 서사를 예리는 공부하듯 외워 나갔다. 
예리는 더 이상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상상의 나래를 멈춰야 했던 이전의 예리가 아니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용기가 차올랐다. 이제는 정말로 실행만이 남은 것이었다. 

다음날 밤 예리는 요셉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리는 놀이터에 가서 한 아이가 혼자 타던 그네를 뺏었다. 옆에 빈 그네가 있었는데도 아이에게 비키라고 말했다. 
“애기야, 여기 있지 말고 딴 데 가서 놀아. 알았지?” 
예리는 그네에 앉아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며 요셉을 기다렸다. 
“김예리 학원 끝나고 바로 왔어?”
“응.”
“오늘 서민규한테 롤 졌어 씨발. 불닭볶음면에 슬러시까지 내가 다 냈다고.”
“나 하고 싶은 말 있어.”
“뭐?”
“나는 궁금해.”
“뭔 소리야?”
“나도 너 좋은데.”
예리는 그네를 멈추고 일어서서 요셉에게 먼저 다가가 입을 맞췄다. 잠시 후 입술과 입술이 서로 포개졌을 때 요셉이 먼저 혀를 들이밀었다. 아무도 없는 놀이터, 노란 가로등 불빛 아래, 서서히 나무 냄새가 짙어지는 초여름 밤의 첫 키스는 예리가 기다려왔던 분위기 그대로였다. 혓바닥끼리 휘감길 때마다 배꼽 아래가 조여지는 느낌도 예리의 기대에 부응했다. 그러나 예리의 교복 블라우스 안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만지려던 요셉이 “아 나 사고 치겠다, 내가 기다릴게 천천히 하자 우리” 라고 하며 예리를 품에 꼭 껴안을 때 예리는 끝까지 가지 못하는 남자친구에게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단단해진 요셉의 청바지 가운데를 한껏 느끼며 예리는 생각했다.
왜 지금은 더 가면 안 되는데? 내가 여기서 이거 만지면 너는 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겠지. 나는 ‘적당히’를 모르는 걸레 같은 여자애로 찍혀서 그 어떤 남자애도 나에게 더 이상 다가오지 않겠지. 야, 근데 최원준이랑 김태진은 장난으로 여자애들 꺼 만지고 다니면서 나는 지금 왜 안 되는데? 너도 걔네랑 6반 교생 다리 찍은 영상 돌려보면서 나는 왜 중간에 그만둬야 하는데? 너네는 못 멈춘다면서 왜 나는 멈춰야 하는데?
하지만 예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느 때처럼 웃어주고 헤어졌다. 먼저 키스한 것도 이미 ‘이상한’ 여자애로 여겨질 일이라는 사실을 예리는 잘 알고 있었다. 이것보다 더 나갈 수는 없었다. 


이선형의 교생 실습 두 번째 주는 별일 없이 지나갔다. 예리는 입술을 깨물며 멀리서 이선형을 관찰하기만 했다. 예리와 요셉은 첫 키스한 날을 1일로 잡았고 공식적으로 애인 사이가 되었음을 모두에게 선포했다. 그 주 주말에는 약간의 별일이 생겼다. 예리가 요셉의 성기에 손을 댄 것이다. 그날도 아파트 단지 으슥한 구석들을 찾아다니며 숨이 막히도록 키스하고 있었는데 예리는 점점 부풀어 오르는 그것을 만져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손으로 이리 툭, 저리 툭 밀어보다 잡아보고 싶기도 하고 징그러워서 손을 떼고 싶기도 했지만, 그것이 잘 보이지도 않는 저 밑의 작은 구멍에 언젠가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망설였다. 그때 요셉이 “나는 너를 사랑하니까 지켜주고 싶어. 나 남자잖아”라고 말했고 예리는 한숨을 크게 한번 내쉰 후 물었다. 
“근데 너 해 봤어?”
  
하고 싶지만 정확히 누구와 하고 싶은지, 할 수는 있는지 알 수 없었던 예리는 그날 밤 계속해서 요셉의 크고 굵은 손과 이선형의 얇고 마른 손가락을 떠올렸다.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매일 사용하는 하나의 신체 부위는 더 이상 그들의 신체 부위로만 존재하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일들을 상상하면 할수록 머리가 울리고 다리가 오므려졌다. 꿈속에서 예리는 누군가에게 나를 더 괴롭혀줬으면 좋겠어요, 라고 수없이 말했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정도로 몽롱했던 새벽에 예리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았다. 침대에 누웠을 때 요셉만 생각났다면 차라리 괜찮았을 것이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요셉이, 왼쪽으로 고개를 비틀면 이선형이 누워 있는 것만 같았다.
모텔 문을 열고 들어가는 사람들은 다 처음부터 누구랑 어떻게 하고 싶은지 알았을까. 팬픽을 쓰는 사람들은 그런 자세한 내용을 다 어떻게 알았을까. 누가 가르쳐 주는 걸까. 해 보면 다 아는 건가. 
생각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예리의 손이 움찔움찔했다.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이건 내 손이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잠옷 바지 안, 배꼽 아래까지 손을 대는 것은 가능했지만 그 밑으로 더 내려갈 수가 없었다. 은지도, 수민이도, 요셉도, 엄마도, 아빠도 자신에게 미친년이라고 할 것 같았다. 누군가는 매일 학교에서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여자애들 눈앞에 갖다 댔지만, 정작 여자애인 예리는 그 곳을 만질 수조차 없었다. 


예상외의 이른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밤, 예리는 학원을 빠졌다. 조교에게 연락받은 엄마에게서 끊임없이 전화가 오고 있었지만 예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날은 3주간의 교생실습이 잘 끝난 것을 축하하는 교사들의 뒤풀이가 벌어지는 날이었다. 이선형은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하며 칠판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어주었고 예리는 번호를 저장하며 결심했다. 오늘이 마지막 기회였다. 어차피 이선형은 떠날 것이고 다른 애들은 모를 테니까 괜찮을 거라고 믿었다. 예리는 엄마를 수신 차단한 다음 이선형에게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다. 
“쌤, 저 예린데요.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요 쌤.”
“예리? 김예리?”
“네. 1반 김예리요.”
예리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짜고짜 이선형에게 어디인지 물었다. 이선형은 무슨 일이냐고 재차 물었고, 망설이던 예리는 “저 애들한테 맞았어요 쌤. 학폭 당했다고요.”하고 대답했다.  
“지금 당장 쌤 있는 곳에 가서 얘기할게요. 근데 담임 쌤한테 말하거나 우리 엄마한테 전화하면 가출할 거예요. 지금 저 죽을지도 몰라요. 쌤이 나 안 만나주면.”
자신의 입에서 술술 나오는 거짓말을 믿고 싶은 예리와 그럴 수 없는 예리가 예리의 안에서 부딪쳤다.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는 예리 옆에서 또 다른 예리가 이렇게까지 해서 만난 후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예리는 자신의 말과 행동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한 예리를 막으며 이선형에게로 향했다.  

잠시 후 예리는 학교폭력의 현장에 있었다기에는 너무나 멀쩡한 모습으로 이선형의 앞에 섰다. 맞았다는 건 거짓말이고, 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왔다는 예리를 보며 이선형은 경악했다. 
“예리 너 진짜 무서운 애구나.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하니?”
“쌤, 쌤 왜 모른 척해요? 그날 화장실에서 있었던 일.”
“무슨 소리야?”
“쌤 학교에 온 첫날, 화장실에서 저 마주쳤잖아요.”
“그래서?”
“저한테 머리 푼 게 더 예쁘다고 했잖아요.”
“예리야.”
“그거 무슨 뜻이었어요? 그리고 그때 막 손가락도 스치고…”
“정신 차려 예리야. 내 인생에 첫 교생 실습이라 진짜 잘 해내고 싶었어. 특히 여자애들한테 정말 잘해주고 싶었고. 그 날 화장실에서 네 표정이 얼마나 우울해 보였는지 알아? 나도 그랬으니까, 중2때 진짜 힘들었으니까, 친절하게 말 걸어주고 싶었던 거야. 외모에 한창 예민할 때니까 다 괜찮다는 칭찬 나라도 많이 해주고 싶었어. 내가 왜 이런 얘기까지 해야 되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가지만 보라한테도 지아한테도 다 예쁘다고 했어. 그러니까 아무 의미 없는 거였다고. 너 지금 요셉이랑 다른 애들이랑 짜고 선생님 놀리는 거지? 너희들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그만해. 바르게,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응?”

바르게라니, 이성적으로라니. 순간 예리는 아무것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앞에 있는 이 여자를 한 대 치고 싶은 충동과 이 자리에서 콱 죽어버릴 수도 있을 만큼의 창피함이 함께 솟구쳤다. 동시에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멈추고 싶지 않았다. 더 나빠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선형의 새하얀 얼굴과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황당해서 반쯤 벌어진 입술이 예리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예리는 주저하지 않고 다가가 이선형의 벌어진 입술에 입을 맞췄다. 막무가내로 자신의 입술을 욱여넣었고 상대의 입술을 빨았다. 말랑한 입술 안쪽 살갗을 혀로 핥으려던 순간에 예리의 몸이 뒤로 확 밀쳐졌다. 
예리는 밀쳐진 그 자리에 숨도 쉬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땀으로 흠뻑 젖었던 몸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입을 맞추면 더한 것을 바라게 될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강제로 입을 맞추고 나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예리는 이선형의 얼굴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키스 후 오히려 몸이 차갑게 얼어버린 듯한 이 느낌은 어떤 팬픽으로도 배운 적이 없었다. 예리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지만 이선형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도망치기 위해 급히 몸을 돌렸다. 그 때 이선형이 예리의 등 뒤에서 말했다. 
“네가 정말로 원했던 게 이거 맞아?” 


그제서야 예리는 아까 또다른 예리가 예리에게 진짜로 묻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예리는 한참을 걸었다. 어느새 저 멀리서 해가 떠오르는 새벽이었다. 딱히 갈 곳도, 갈 수 있는 곳도 없었다. 아무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걷기만 했다. 한참을 돌고 돌던 발걸음이 멈췄을 때, 예리는 모두가 보이지 않는 장소처럼 취급하는 그곳, 모텔촌 앞에 있었다. 굽이굽이 이어진 낮은 회색빛 건물들과 빨갛고 파란 조명이 꺼진 간판들 너머 예리가 사는 고층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숨 막히게 고요한 그 길고 어두운 골목들을 예리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천천히 발을 옮겼다. 
손을 어떻게 하고 걸어야 할지 애매해서 어깨의 책가방 끈을 꼭 쥐고 걸었다. 
골목은 또 다른 골목으로 이어져 있었다. 탁한 초록색 장막과 검은 문들만이 예리를 내려다보았고 습한 정적만이 예리를 맴돌았다. 더 깊이 들어갈수록 예리는 알았다. 그곳에는 무서운 것도 없었지만 예리가 원했던 것도 없었다. 일부러 크게 들이마셨던 그 눅눅하고 축축한 공기, 단지 그것뿐이었다. 보이지 않는 척할 필요가 없는 곳이었으며 예리가 찾던 곳은 더더욱 아니었다. 발을 돌려 나가려고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멀리서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선형일 것이다. 예리는 이선형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한테 왜 그랬어? 이선형의 눈이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또 다른 예리가 다시 말했다.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그 때 예리는 눈을 떴다. 여전히 체육 매트 위에 누워 땀을 흘리고 있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공기 중에 흩날리던 크고 작은 먼지들도 바닥에 고요히 쌓여 있었다. 예리는 배에 손을 올려 보았다. 그 날부터 지금까지 여기서 자전운동을 하는 감정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가한 키스와 그 키스가 남기고 간 싸늘한 부끄러움에 대해 생각했다. 
예리는 문득 자신이 좋아했던 노래의 가사를 흥얼거렸다. 내 마음이 이렇게 다채로운지 몰랐다는 가사는 ‘그 눈에 비친 나를 사랑하게 됐거든.’이라는 문장으로 이어졌다. 그 말이 대체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 까마득하게 느껴지던 순간, 또 다른 예리는 예리 옆에 가만히 평행하게 누워 있었다. 
(끝)


◇ 소설에 등장한 노래 가사는 아이브(IVE)의 '일레븐(서지음, Peter Rycroft, Lauren Aquilina, Ryan S. Jhun 작사)'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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