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2

박준서

 

창밖에는 서글픈 눈이 온다.

창밖에는 신이, 떨어뜨린 눈이, 떨어진다 제냥. 온 세상이 그의 은총.

*

나는 구원론자다. 구원할 구 자에 구원할 원 자라… 그저 운 나쁘게 동어반복의 수레바퀴에 포획된 것으로 생각한다.

-참고로 포도는 안 좋아하고 헌법은 좋아한다. 우주는 좀 어려운데, 모르긴 몰라도 괴로운 말일 거라고 생각한다. 우주론적 논변에 깔려 질식하기를 원하며 빅뺑은 사기라고 믿는다.

어렸을 때부터 구원을 찾아 헤맸다. ‘배꼽’ 이전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6살 때 여름 성경 학교에서의 일 이후로 관뒀다. 8살 때는 구원 투수 채병용에게 희망을 걸어봤다. 그해 한국시리즈 7차전 9회말에 내 구원은 끝내기-월좌했다. 머리가 큰 뒤로는 부모님께 부탁해서 유로화를 매수했다. 구라파 돈이니 구원 맞다. 이것도 브렉시트 때 포기했다.

이제 내게 남은 건 MJ뿐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MJ는 죽었으니. 당신은 나를 떠나면 안 돼요.

각설. 아무튼. 이상은 농담-따먹기 같은 거고 이제 소설을 시작하자.

***

“시간.”

“시간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시간의 본질이 무어라고 생각하나요. 사물? 현상? 하나의 차원, 아니면 단지 인간 인식의 산물일까요?”

철학 교사는 일 학기의 두 번째 수업을 장황하게 시작했다. 입법가들은 백범 김구 탄생 1** 주년을 맞아 그의 소원을 받드는 의미에서 『아름다운 나라 법(일명 ‘김구법’)』을 비롯하여 『K-바깔로레아 시행에 관한 법률(일명 ‘신수능법’)』 등을 만들었고, 같은 시기 일본 문화 덕후인 대통령은 교육 개혁의 분위기를 틈타 자신의 취향을 반영한 『구락부 개혁에 관한 특별조치법(일명 ‘동아리법’)』을 제출하여 날치기-통과시켰다.

“무엇이 시간을 그토록 특별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걸까요. 절대적이면서 상대적인, 주관적이면서 객관적인, 관념인 동시에 물질인 시간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문제는 백범의 생일 잔치가 우리 고3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데 있다. 가장 중대한 변화는 이제 프랑스의 바깔로레아를 모방한 새로운 시험을 치러야만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학제가 개편되어 우리는 주에 세 시간씩 철학 수업을 듣게 되었다. 저 사람도 그래서 덜컥 며칠 전에 일자리를 얻게 됐겠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자기소개 다음 시간에 바로 시간 이론은 좀 너무하지 않나?

“B-이론가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시간은 사건들의 순서 관계로만 규정되는 무시제적인 틀이라고. 그게 무슨 말인고-하니, 마치 내가 ‘여기’라고 말하는 장소가 그 어떤 특권도 갖지 않는 것처럼…”

‘…내가 현재라고 부르는 시간도 형이상학적으로 특별할 것이 없는 것이다’ 이 구절은 예전에 읽은 적 있다. 베낄 줄밖에 모르면서 꼴에 철학 운운하는 모양이라니. 웃기지도 않다. 대충 밝다 만 철학 교사를 앞에 두고 나는 그를 걱정했다. 당신은 무엇으로 사나요. 당신도 언젠가 당신 나름 얄팍한 의미를 찾고-실은 절망을 위해-일본 소년 만화 같은 대사를 뱉었겠지. 몇 번의 오럴과 함께 자위했겠지. 저 사람은 분명 죽으면 지옥 갈 거야. 형이상학은 지옥의 언어.

“반면 A-이론가들은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것만이 실제이고, 과거와 미래는 실제적이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이런 차별을 두는 것도,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제적인 틀로 시간을 바라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겠죠. 요컨대 A-이론가들에게…”

지옥이라… 아아, 지옥은 어떤 곳이었지? 천국은 어떤 곳이더라?

“예컨대 이런 문장을 생각해봅시다. ‘어린 마이클 잭-쓴은 까맣다’ 그리고 ‘나이 든 마이클 잭-쓴은 하얗다’…”

*

3월의 화요일은 꼭 소설 같다. 반쯤 진지하면서 반쯤 밝고, 개중 밝은 진지함은 내 맘을 간질인다. 봄잠은 천천히 오다가 금세 달아나고, 일본의 분홍 꽃은 그녀의 볼에.

-아, 참고로 호모섹슈얼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집 가서 MJ 8집 들어야지~

사실 내가 MJ에 빠진 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짝사랑하던 선배가 있었다. 그 선배는 항상 특유의 ‘노란색 버튼의 하늘색 아이팟’으로 MJ 노래만 듣는다고 했다. 춤을 잘 출 것 같은 이미지는 아닌데, 볼 때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리듬을 타고 있었다. 선배는 아마 내 존재도 몰랐을 거다. 그런데도 나는 항상 MJ가 혹시나 내 이름 ‘민지’와 어떠한 연관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즈음부터 MJ를 알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선배에게 말을 붙여보기 위함이었다기보다는 그저 선배와 모종의 연관이라도 가지고 싶었던 것 같다. MJ가 ‘선배가 좋아하는 가수’로 선정된 이상 나에게도 그러해야 했다. MJ를 좋아하기로 미리 정해놓고 그럴듯한 이유를 찾았다. 그럴듯한 이유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선배가 졸업했다. 거짓말처럼 선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선배의 아이팟은 생생하게 기억하지만 선배의 얼굴은 가물가물하다. 그다지 잘생긴 편도 아니었던 것 같은 느낌이다.

이제, 선배는 떠났지만 MJ는 남았다. 이유는 떠났지만 위대함은 남았다.

-EU는 떠났지만 유로화는 남았다.

이제, MJ가 왔다. 결국, MJ는 왔다. 나는 그 무엇의 결과도 아닌 제1원인을 생각했다. 지옥불의 원천, 그 끝에 천국. 억압받는 댄서의 엉덩이 만세 그리고 아멘.

죽은 MJ는 다시 선배를 데려올 수도, 살아 돌아올 수도, 나를 떠날 수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

“민지야.”

“아, 석열이구나.”

“민지야, 너 4번 동작 외워 왔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석열이는 지난주 치어리딩 구락부(舊 응원단) 활동에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누가 봐도 느껴질 만한 비관적인 콧등이 인상적이었다. 저 콧등을 가지고서는 지옥도 두렵지 않을 거다.

근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아무래도 석열이가 나를 좋아하는가 싶다. 몇 번 안 봐서 확신은 없지만 만날 때마다 자꾸 부담스러운 말들을 해댄다.

“민지야, 너는 우울해질 때 뭘 해?”

“민지야, 너는 이번 대선에서 누구 찍을 거야?”

“민지야, 너 멜론빵 좋아해?”

“민지야, 너는 유로화 환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민지야, 너는 아름다움이 뭐라고 생각해?”

아름다움이라…

“음, 아무래도 MJ의 손가락 끝? 스텝? 아니면…그의 음악 전반이라고 해야 할까? 씁, 아니다. MJ가 우리에게 남긴 것.”

-하 씨, 무시했어야 됐는데. 게다가 너무 신나서 대답해버렸잖아.

“MJ? 아, 마이클 잭-쓴 좋아하는구나.”

“응, 당연하지.

“음, 근데 그런 거 말고. 그건 그냥 네 취향이잖아. 그런 거보다 좀 보편적이면서도 추상적으로, 아름다움이라는 관념에 대해 말한 거였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약간 치의 분노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더 얘기하기 싫은가 보네. 으음… 그럼 이건 어때? 내 생각에 아름다움은 바로 여성에게 있어, 아름다운 여성. 그 하나의 여성을 이루는 총체, 그게 바로 아름다움의 원천이자 종착지인 거지.”

“사실 나는 아름다움이 흘러나오는 것부터 시작해서 다시 스며드는 것까지 전부 다 느낄 수가 있거든. 그런 의미에서 내 생각에 아름다움은 결국 다이내미즘이야. 노을이 담긴 사진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지금 내 앞에 너만이 의미가 되는 거지.”

고교 3학년생이 가질 법한 개똥철학. 그 교사에 그 학생이라 하겠다.

“아니, 아니, 잠깐만.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 있기는 하니? 뭐가 자꾸 흐르고 어쩌고. 그 잘난 네 말대로면, 관속에 파묻혀서 이제 움직이지 않는 것들은 절대로 아름다울 수 없다는 거 아냐? 그러면, MJ는 죽어도…크흠, 이미 죽었으니까 글러 먹었겠고. 그럼 베토벤은? 그럼 어디 횔덜린, 라벨, 발자크, 차이코-옵스키, 엔리코 페르미, 고걍, 비스마르크, 미시마, 에릭 로메르, 박종호의 영원한 이름들도 한번 부정해보시지?”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이건 좀 과했다. 심지어 박종호는 살아있다.

그건 그렇고 위에 볼드체로 쓰여있는 저 말… 혹시 방금 그거 고백이었나? 하, 진짜 싫다. 음, 다시 생각해봐도 진짜 싫다. 아니, 얘는 내가 왜 좋지? 내가 쪼끔 귀엽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안 맞는 사람은 정말 싫은데.

아무튼, 내 앞에서 MJ를 공격하다니. 네놈하고는 말도 섞지 않을 테다. 게다가 좀 전에 말할 때 온갖 숭고한 척은 다 하면서 힐끔힐끔 허벅지 쳐다보는 건 또 뭔데? 으, 그것도 여성-노선이라고 해보시지. 하여튼 사춘기 남자애들의 성욕이란.

“민지야, 일단 진정해봐. 진정하고 내 말 들어봐. 그래, 네 고집이 그렇게 센 줄은 내가 몰랐네, 미안해. 근데 있잖아, 나도 굽힐 생각은 없어. 마이클 잭-쓴이 아름다움을 가졌었다면 그랬을 수 있지. 하지만 민지야, 이제 마이클 잭-쓴은 없어. 아름다움이 흘러나오지 않는다고. 뭐, 지금 같은 상황에서 고백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나는 그딴 거보다 오직 내 앞에 아름다운 여성, 바로 네가 필요할 뿐이야. 너도 생각을 바꿔 먹어 보는 건 어때?”

“닥쳐, 허벅지나 작작 쳐다봐.”

검은 마이클 잭-쓴 대 우유색 허벅지.

*

오늘의 공기는 무겁고 짙은 색을 하고 있다. 방송반 후배 놈은 서부극 배경음악을 틀었다. 지난주 연습 때 내가 유사-고백을 거절한 뒤 문을 박차고 나왔기 때문은 아닐 거다. 예로부터 우리 치어리딩 구락부는 댄스 구락부(舊 댄스부)와 오랜 라이벌이었다고 한다. 축제 공연 순서 문제부터 예산 문제, 연습실 이용 문제와 같은 고전적인 문제가 산적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난해 부학생회장 오빠를 둘러싼 응원단장과 댄스부장의 개인적인 라이벌리는 이 시대의 문제로 대두되었다. 누구의 묘안인지, 다음 달에 있을 봄 축제에서 두 구락부의 콜라보레이션이 합의되었다. 두 구락부는 서로를 벼르고 있다. 당사자들은 졸업했지만 복수는 후배들의 몫, 콜라보 공연은 어느새 경연으로 불리고 있었다.

-참고로 부학생회장 오빠는 자신의 과외를 맡았던 대학생 언니를 쫓아다니느라 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주의주장이 하상 무엇인고, 그 실지를!

경연곡은 당연히 MJ. 논쟁은 그의 곡 중에서 무엇을 고를지를 둘러싸고 발발했다. 치어리딩 측은 6집의 ‘Beat It’, 댄스 측은 7집의 ‘Smooth Criminal’. 즉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유리한 곡을 선정하기 위한 분투였다. 선정 방식으로 제시된 안은 총 세 가지였다. 첫째, 두 구락부원들의 합동 투표를 진행하고 이에 따른다. 이 안은 구락부원이 더 많은 댄스 구락부 측의 지지를 받았다. 둘째, 전교생 투표를 진행하고 이에 따른다. 이 안은 교내 최고의 미녀 이유진을 보유한 치어리딩 측의 이익을 대변한다. 셋째, 양측은 서로에게 구애받지 않고 각자 한 곡씩을 선정한다. 이 안은 비주류다. 고교생들은 서로를 벼르고 있다. 시사평론 구락부의 중재하에 선정 방식을 채택했다. 시사평론 구락부장은 지난 화이트데이 때 이유진에게 레몬맛 사탕을 선물한 5인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도도한 여자는 레몬맛 사탕을 좋아한다나.

-매점 아저씨 曰, 민주주의는 사랑을 응원한다네.

경연곡이 선정되고 곧바로 두 구락부는 합동 수뇌부 회의를 거쳐 공연 순서를 확정하였다. 원치 않는 곡으로 경연을 치르게 된 댄스 구락부 측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치어리딩 구락부가 1절을 마치고 퇴장하면 간주 동안 댄스 구락부가 등장하는 것으로 되었다.

장정은 시작됐다. 이제 한 번에 세 시간씩, 주에 세 번 연습하기로 했다. K-바깔로레아를 앞둔 고3에게는 너무 가혹한 일정이다. 그치만 그 자식들에게는 절대 질 수 없다. 오직 승리, 必勝. 판정 기준 같은 건 없다. 스텝 좀 밟을 줄 아는 놈이라면 자신이 졌다는 사실쯤은 쉽게 안다. 결국 이건 나 자신과의 싸움, 그리고 내 마음속 MJ와의 싸움이다.

*

“파이브, 식스, 세븐, 에잇.”

“아이쿠.”

“민지야, 괜찮아? 미끄덩 넘어진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바보야, 미끄덩 넘어진 게 아니라 꽈당 넘어진 거거든. 남이사. 자꾸 말 걸지 마”

“어이 거기 둘, 잡담하지 말고 집중해.”

유진이는 2학년인데도 나를 갈군다. 그것도 반말로. 하긴 예쁘면 언니긴 하지. 유진이는 아마 응원단장 자리를 노리고 있나 보다. 구락부장이라는 말이 영 맘에 안 드는지 유진이는 항상 응원단장이라는 말을 쓴다. 왜 응원단장이 되고 싶으냐고 물으면 늘 못 들은 척한다. 혹시 부학생회장을 좋아하나?

이번 곡에서 거의 백댄서나 다름없는 역할을 맡았지만 그렇다고 부담이 없는 건 아니다. 긍지 높은 치어리딩 구락부 32기로서, 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대를 완성한다는 사명을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공연 날까지는 흰색 속옷만 입고 자기로 했다. 사실 떨려서 잘 못 잔다. MJ, 순결, 긍지, 석열, 사랑, 권력… 이런 생각을 한다.

“지금 딴생각하는 년 누구지? 민지야, 정신 차려야지?”

“죄송함다.”

연습 부족은 패배의 지름길! 必死!

그때였다. 계속된 연습으로 바닥이 닳아버린 건지, 빤질빤질한 나무 바닥 위에서 나는 미끄덩하고 공중으로 날았다. 세상이 슬로우-모션으로 보였다. 그 찰나에는 좀 재미있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이제 떨어진다는 걸 알았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물리 시간에 엘리베이터에서 추락할 때 점프할 수 없는 이유를 배웠던 거 같은데’, 하고 생각하다가 그 이유를 떠올리기 전에 엉덩이에 고통이 찾아올 게 예상됐다. 하지만 웬걸, 내가 물리를 못한다는 사실을 떠올릴 즈음에 엉덩이에 기분 나쁜 폭신함이 느껴졌다. 석열이가 몸을 던져 나를 구했다. 나중에 듣기로 석열이는 이 일 때문에 다리가 부러졌다고 한다.

“으윽… 민지야, 미끄덩 넘어진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석열아, 너 괜찮아? 너 연습 계속할 수 있겠어?”

“참, 사람이 다쳤는데도 연습이 먼저라니. 역시 너다워, 흰 팬티의 소녀. 윽, 나 같은 놈은 그렇다 쳐도 너는 꼭 무대 서야 되잖아, 민지야. 네가 내 몫까지 더 열심히 해줘.”

그새 팬티를 봤네, 흰 팬티.

*

석열이는 발에 석고를 감아놓아도 연습에 빠지는 법이 없었다. 매번 앉아서 내 연습을 구경한다. 생명의 은인인 데다가 딱히 말을 걸거나 하지는 않으니 그냥 그러려니 한다.

사실은 조금 신경 쓰인다. 쳐다볼 걸 알았지만 긴바지는 입지 않았다. 석열이가 파이팅을 외치는 목소리는 고된 연습에 힘이 된다. 자기 몫까지 열심히 해달라는 말이 자꾸 생각났다. 팬티를 보려고 몸을 날린 건지는 몰라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지난번에 나보고 예쁘다고 했던 말이 왜 이렇게 자꾸 떠오르는 건지. 그래, 아무래도 나는 석열이를 좋아하게 되었나 보다.

연습을 마치고 석열이랑 짜장면을 때리러 왔다. 짜장면 하나, 간짜장 하나를 시켰다. 석열이는 간짜장을 주문하며 자기는 원체 음식을 잘 안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나마 간짜장에는 다이내미즘의 정신이 담겨있다나. 얘 좋아한다고 했던 말 취소.

그럭저럭 음식을 먹던 차에, 우리 옆 테이블이 댄스 구락부원이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남자애 하나가 탕수육을 씹으면서 Beat It 안무 영상을 돌려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애한테 말을 걸었다.

“넌 이름이 뭐니?”

“준서, 박준서.”

“너 뭐 보고 있어?”

“RS-28 싸르마트.”

Beat It 안무 영상은 어느새 웬 러씨야 탄도-미싸일 발사 영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잔기술이 장난 아닌 놈이다. 꼭 거짓말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나도 내 신분을 굳이 밝힐 필요는 없겠지.

“그래, 반가워. 다른 건 아니고, 혼자 먹고 있길래 같이 먹을까 해서.”

“으음, 마음은 고마운데, 안 될 거 같아. 나는 좀 중요한 사람이거든.”

“그, 그래…? 그렇구나. 그래 뭐, 뭐 하는 사람이길래 그렇게 중요하니? 혹시 뭐, 춤이라도 추나?”

“춤? 웬 춤? 사실 나는 남파공작원이야. 뭐 딱히 싸보따주를 하는 건 아니라서 신고해도 잡혀갈 일은 없긴 한데. 그저 우리 북조선의 전략무력을 믿고, 미싸일에 불타 죽고 싶다고 생각할 뿐야.”

“흐익! 아니, 정말이야?”

-내가 왜 그 허무맹랑한 말을 믿었는지는 모르겠다. 준서의 말에는 왠지 모를 신뢰가 있었다.

“그래, 언제 떨어질 지도 모르고 떨어진다는 것조차 확실치 않아. 탄도-미싸일, 그 무한한 불확실성만을 희구하는 삶을 살아.”

“그래, 알았어.”

나와 석열이는 자리로 돌아왔다. 눈이 마주쳤다.

*

그렇게 한동안은 눈코 뜰 새 없이 지냈다. 일과 중에는 새로운 시험을 대비했고, 연습 때는 일상적인 목숨을 걸었으며, 석열이는 늘 그 자리에. 탕수육맨은 그저 맥거핀인 줄로만 알았다. 하긴, 정말로 아무 의미 없었으면 이 짧은 소설에 등장했겠니?

*

마지막 흰색 속옷을 입었다. 유진이는 신경이 곤두섰다. 댄스 구락부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합동 리허설이니만큼 만전을 기했다. 석열이는 언제나 그랬듯 관객석에 앉아있고, 나는 대열의 맨 오른쪽에 섰다. 음악이 시작됐다. 째지는 일렉 기타 소리에 맞추어 응원 수술을 흔들었고 어느새 심장 박동은 육중하게 울리는 킥의 박자를 따랐다. 작은 실수가 있었지만 큰 무대에 적응하는 과정이리라. 1절을 마치고 우리는 일사불란하게 퇴장했다. 간주 동안 댄스 구락부가 무대에 올랐다. 역시나, 왼쪽에서 세 번째 댄서는 낯이 익었다.

리허설을 마치고 나는 댄스 구락부 애들이 모여있는 쪽으로 갔다. 견제하는 눈초리 때문에 그 애한테 말을 걸지는 못했다. 우리 쪽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연습실로 돌아가서 마지막으로 한 번 맞춰보고 해산하기로 했다. 모순적이지만, 실감이 안 나면서도 이제 정말 끝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마지막 연습은 딱히 열정이나 생각 없이 몸이 가는 대로 하다 보니 어느새 끝나있었다.

석열이한테 가서 최종 피드백 겸 응원을 받으려고 했다. 석열이는 무대에 서지 못하는 대신 무대 관리를 맡았기 때문에 지금쯤 아마 체육관에 있을 거다.

4월의 밤은 푸근함이 옅어지고 연한 하늘색 냄새가 났다. 만화 같은 감색으로 칠해져 있어 은근히 설레기도 했다. 체육관으로 가는 길은 아스팔트 도로에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문득 추웠다. 시큼한 냄새도 조금 났다. 아, 그건 내 땀 냄새구나. 석열이는 멀리서 나를 보고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썩 마음에 드는 자식은 아니지만 얘가 고백하면 받아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석열이는 내일이 없는 것처럼 불태워버리라고 말했다. 이 말은 내일 해야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아무튼 힘이 났다.

석열이에게 인사하고 집으로 왔다. 마음이 이상해서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왔는데, 피곤해서 잠이 잘 올 것 같았다.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 보통 이럴 땐 그동안의 고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든가 석열이 생각이 난다든가 할 텐데, 이상하게 준서 생각이 났다. 그 미싸일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걔는 왜 탕수육만 먹고 있었을까.

*

결코 오지 않을 것 같던 날이 왔다. 오늘은 빨간색 속옷을 입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일어나야 했지만 평소처럼 씻고 평소처럼 먹고 평소처럼 버스를 탔다. 컨디션이 특별히 좋은 건 아니지만 거리낄 건 없는 상태, 전쟁에 어울리는 날씨, 우리에겐 오직 승리뿐이다.

축제는 막을 올렸다. 우리는 축제의 피날레를 장식한다. 초유의 관심이 쏟아졌다. 이런 뉴스 기사에서나 쓸 법한 말들을 내가 쓰게 될 줄이야. 대기실이 좁아서 연습을 할 수는 없었지만 각자 조그만 동작으로 전쟁을 준비했다. 시간이 다가올수록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그간의 연습 덕분이리라. 준비한 음원 파일에 문제가 생겨 다소 소란은 있었지만 금방 해결되었고, 이제 정말 시간이다. 유진이가 어쩌구 저쩌구를 시작했고 나는 늘 그랬듯 정확한 동작으로 무대를 완성하면 되었다.

앞 순서인 마술 구락부의 무대가 끝나자, 암전. 우리는 어제와 같이 일사불란하게 무대에 올랐다. 음악이 시작되고, 일렉, 드럼… 그렇지. 제발 틀리지만 말자고 생각했다. 막상 무대에 오르니 관객도 너무 많고 너무 긴자오됐다. 너무 긴장돼서 오타도 나고 그랬다. 하 씨, 말씀드리는 순간 한 동작 틀렸다. 이제부터라도 틀리지 말자. 나는 긍지 높은 치어리딩 구락부원. 한 동작 한 동작 미션을 깨듯 수행하다보니 1절이 끝났다.

후다닥 퇴장해서 대기실에 석열이한테로 갔다. 석열이가 무슨 말을 할지 기대했다. 나도 모르게 입술 쪽을 봤다. 말을 하려는 것 같지 않았다. 석열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저 콧등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네가 나한테 반했다는 사실을. 상상에도 닿을 수 없던 아름다움에 빠져버렸다는 사실을. 당신의 모든 신념을 걸고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나도.”

알아먹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손을 잡았다. 사실 못 알아들었더라도 손을 잡은 채로 그게 무슨 뜻이냐고 반문할 수도 없었을 거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댄스 구락부의 무대를 봤다. 이제 전쟁 같은 건 어찌 되든 상관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되려나. 그치, 우리가 흘린 땀이 얼만데. 그렇지만 가만 보니까 쟤네들도 죽어라 연습한 게 느껴졌다. 잘하네. 나의 작은 실수가 뼈아팠다. 너무 아쉽지만 패배를 인정해야 겠…

“꺄핫! 뭐야. 쟤 완전히 틀렸잖아? 무대를 저렇게 망치다니.”

준서는 안무를 멈추고 머뭇머뭇하더니 대열에서 이탈하여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드론 조종기였다. 드론은 관객석 뒤에서 삽시간에 날아올라 준서 머리 위로 쇄도했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쉬이익-하는 소리가 들렸다.

몇 초 뒤 준서 머리 위로 ‘북극성-5ㅅ’이 떨어지는 걸 봤다. 저 체크무늬.

“아아, 나의 구원이여.”

준서는 하늘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육중한 미싸일은 곧바로 무대를 완파시켰고 무대 위 댄스 구락부원들은 즉시 사망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과 같은 연출은 분명 아니었다. 미싸일이 정말로 자신의 본분을 다했다면 이 소설도 없었을 거다.

-꿈 같은 不發彈은 디오니소스의 수박 향을, 스스로.

그 체크무늬 로켓은 거꾸로 뒤집힌 채 무대에 꽂혀있었다. 나는 내 허벅지를 봤고 석열이는 로켓을 봤다.

구토. 사실 그날 내 허벅지가 그렇게 예쁜 색을 하고 있는 줄 처음 알았다고, 정강이뼈와 흰 팬티를 바꾸는 건 정말 멋진 일이었다고, 무대 위의 나는 솔직히 반할 만큼 아름답지 않았냐고 진즉 말했어야 했다.

그 순간에, 나는 살고 싶었고, 그는 그렇지 않았다.

잡은 손은 어느새 놓아져 있었다. 나는 서둘러 그의 손을 잡으려 했다. 닿을 것 같았는데 닿지 않았다. 마치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존재 같았다.

그는 어느새 로켓의 옆으로 갔다.

음향 장비가 망가지지 않았는지, 공연의 끝을 알리는 커튼콜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는 물구나무 선 로켓의 옆에 똑같이 물구나무를 섰다. 그의 몸이 잠시 빛나더니 조금 떠오르는 것 같았다.

아멘마침.

***

제발,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영원-활기-무한의 이름이여, 그 막대한 권능으로 나를 구해주세요.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

이 나를, 당신은 다시 찾아주시렵니까.

이 나는, 당신을 항상 기다리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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