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적 상상으로의 여정 -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메모리아>

고민규


1. 충돌하는 다중세계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 영화의 인물들은 항상 어딘가를 떠돈다. <열대병>(2003)의 한 남자는 마을에서는 동성 연인과 데이트를 즐기지만 정글에서는 연인의 모습을 한 유령을 찾아 헤매고, <징후와 세기>(2007)의 병원은 분절된 과거와 현재를 매개하며 그 안의 인물들을 은밀히 자신의 뒤틀린 시공간으로 밀어 넣으며, <엉클 분미>(2010)의 귀신들과 <찬란함의 무덤>(2015)의 고대 신들은 마치 길을 잃어버렸거나 길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렸다는 듯 무논리적인 방식으로 자기 존재를 드러낸다. 그의 영화는 항상 의도적으로 시공간의 길을 잃게 만들며, 이질적인 존재들을 충동적으로 엮어내는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을 관객에게 전달해왔다. 그 영화 속 세계는 “서로 다른 시간이 공존하며 연결됨과 동시에, 과거의 시트들과 현재의 순간들이 끊임없이 서로 치환되고 있는”1) 무대이고, 영화는 여러 인물 혹은 장소를 맴돌면서 그 끊기지 않는 원환 운동을 중계하는 것이다. <열대병>에서 주인공에게 자기 모습을 드러내며 공포와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호랑이와 <징후와 세기>에서 마치 병원 안의 유령들과 심지어 스크린 바깥의 세계까지 빨아들일 듯한 검은 구멍은 이런 다중적인 시선을 잘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이것은 수레바퀴와도 같은 불교의 윤회, 시공간의 통일성에 반기를 드는 해체적 경향 혹은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도약하며 그 세계선을 옮겨가는 원숭이의 ‘점핑’으로 이야기되기도 하였다.2) 아피찻퐁은 항상 떠도는 이미지를 수집하는 동시에 현재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을 충돌시키는 ‘수정cristal’과 같은 영화적 경로를 통과한다. 
 <메모리아>(2021) 역시 떠도는 소리와 그 소리에 반응해 떠도는 주인공 제시카(틸다 스윈턴)에 관한 영화라는 점에서 이전과 비슷한 구조가 차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정글이라는 공간, 귀신과 우주선 등 초현실적 소재는 다시 적극적으로 활용되며 자신만의 감각을 전달해 나가는데, 감독이 태국을 벗어나 찍은 첫 장편 영화라는 점에서 이는 이질적이기도 하다. 그중에서 특히 소리는 <메모리아>에서 제시카의 기억을 끌어내기 위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소재인데, 영화는 제시카가 듣는 환청인 ‘쿵’ 소리를 추적해 나가는 것에 거의 온 힘을 다한다. 그리고 아피찻퐁의 영화가 항상 그렇듯 <메모리아>도 이 환각과 같은 소리를 필두로 결국 관객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미로에 가두는 것에 성공한다. 도대체 제시카의 여정이 도착하는 영화적 장소는 어디이며, 전작과 이어지는 아피찻퐁의 전략은 이 영화를 어느 방향으로 이끄는가? 영화가 끝나도 이 질문은 관객들의 머릿속에 쉽게 정돈되지 못한 채 맴돈다.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일단, 영화의 맨 처음 ‘쿵’ 소리가 모두에게 울려 퍼지듯, 소리의 영화적 지위에 관한 논의가 가장 알맞은 시작점일 것 같다. 


2. 제시카의 증상
 소리의 독특한 지위는 이미지와 소리를 인식하는 과정의 차이에서 분명해진다. 우리의 시각은 어떤 존재로부터 부딪혀 나온 빛을 통해 이미지를 받아들이면서 그 이미지 자체를 어떤 존재로 인식한다. 이와 다르게 청각이 발원지로부터의 소리를 받아들일 때는 그 소리를 발원지 자체와 동일시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소리는 항상 발원지에 종속적으로 받아들여지며, 다시 말해 이미지의 지각과는 다르게 소리의 지각은 그 원천과 분리된 채 부수적으로 인식된다. 즉, “어딘가로부터 듣는 것이 듣기의 본질”3)이므로 소리의 재현은 이미지와는 다르다. 이미지란 곧 그 ‘무엇’이지만, 소리란 무엇‘으로부터의’ 소리이다. 인식에서 이미지는 존재 그 자체이지만 소리는 존재의 흔적인 것이다. 우리는 항상 소리 그 자체를 듣는 와중에도 발원지의 존재에 대한 기본적인 가정을 함께 지닌다.
 제시카의 여정은 자신의 감각과 발원지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즉 소리라는 실마리를 통해 어떤 근원지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그렇기에 <메모리아>는 이런 거리를 메우는 여행 자체가 되며, 여기에서 아피찻퐁 감독의 전작과는 다른 <메모리아>의 독특한 지점이 생긴다. 제시카가 듣는 소리가 사실 발원지가 없으며 그 근원이 제시카 자신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발원지의 근원이 제시카 자신이라면 그녀가 듣는 ‘쿵’하는 소리는 그녀 기억의 발화일 수도 있다. 동시에 영화는 소리의 발원지가 내면일 수도 있고 외부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함께 품고 진행되는데, 이것은 <메모리아>의 세계 또한 존재들이 윤회를 반복해 유령처럼 나타나는 불가사의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쿵’ 소리는 다른 세계의 어떤 존재가 제시카에게 오배송한 목소리로, 다시 말해, 두 세계 간의 균열, 어긋남 혹은 ‘뛰어넘음’으로 암시된다. 영화 초반부에 제시카가 ‘쿵’ 소리를 듣고 깨어난 쇼트는 주차장의 자동차들이 갑자기 무언가에 반응한 듯 요란스레 경보음을 울리는 쇼트와 몽타주 된다. 그러나 공원에 앉아있거나 동생과 식사할 때 들리는 ‘쿵’ 소리에는 오직 제시카만이 반응한다. 이처럼 영화의 몽타주는 소리의 매개적인 특성을 이용해 제시카의 내면과 외부 세계를 교차시킨다.
 목소리는 신체 기관의 발화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신체와 목소리가 일치하지 않는 괴리가 생기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예를 들어,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블루 벨벳>(1986)과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에서는 이런 목소리와 신체의 불일치가 립싱크라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입이 멈추어도 노래가 흘러나오고 반대로 입은 노래하지만 더 이상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신체에 느껴지는 괴리감은 가시적인 세계의 이면과 마주하는 경험의 시작이다. 마찬가지로 소리를 듣는 감각과 침묵하는 기관들의 부조화는 제시카의 몸 혹은 기억에 어떤 균열이 발생하고 있음을 나타내는데, <메모리아>는 이 균열을 마치 일종의 ‘병’ 혹은 신경증적인 ‘증상’처럼 묘사한다. 
 <메모리아>는 아피찻퐁 감독이 겪은 ‘폭발성머리증후군’이라는 일종의 수면장애 경험에서 출발한 영화이다. ‘쿵’ 소리가 일종의 병적인 증상으로 묘사되는 이유는 아마 여기 있을 것이다. 그래서 <메모리아>는 마치 치료의 여정처럼 느껴진다. 제시카에게 ‘쿵’ 소리라는 증상이 발현되고, 그녀는 그것의 원인을 탐사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균열을 발견하고, 결국 그 증상을 치료하는 것이다. 한 인물이 이렇게 아피찻퐁의 세계를 자발적으로 인지하고 탐사하는 것은 그의 다른 영화와 비교해 이 영화의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다. 제시카는 감각의 근원을 탐사하기 위해 정글 안으로, 동시에 자신의 기억 안으로 들어가는데, 여기서 정글이란 잠재적 시공간들이 혼합된 기억 행위와 재구성의 공간이며, 이는 꿈과 다름이 아니다. 결국, <메모리아>는 드러나지 않은 기억이라는 세계를 꿈-탐사를 통해 탐사하는 정신분석학의 틀만 전면적으로 차용해 자신의 이야기를 진행하는 영화인 것이다.
 <메모리아>의 난점은 여기에서 드러난다. 아피찻퐁 감독의 영화는 마치 변동을 중개하는 픽션 구조처럼 “많은 부분을 감춘 채로 생략을 통해 열린 미지의 영역을 지탱하는 불확정적 존재” 4)를 남긴 채, 다른 가능세계를 만들고 교차시키며 결코 봉합할 수 없는 고의적인 잉여를 남겨두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제시카의 ‘증상’이란 ‘열린 미지의 영역’에서의 균열이며, <메모리아>는 고의적으로 이 균열을 모호하게 다루는 방식을 선택한다. 제시카의 증상은 어떻게 치료되는가? 애초에 제시카는 치료되는 것인가? 이 질문을 앞에 둔 채 아피찻퐁 감독은 언제나 그랬듯이 직접적인 답을 고의로 회피한다. 대신 그는 고고학과 아카이브라는 지난하지만 매혹적인 단서를 영화 곳곳에 흩뿌린다.


3. 고고학Archeology과 아카이브Archive
3-1 시간의 발굴
 아피찻퐁은 <열대병>의 호랑이를 “실재하지 않는, 바람에 떠다니는 기억의 흔적”5)이라고 언급한 바 있는데, <메모리아>의 ‘쿵’ 소리도 이런 맥락에 있으므로 기억할 만하다. 그에게 있어 기억이란 마치 지층처럼 쌓여 자신만의 시간을 간직한 채로 보존된 장소이고 그래서 각각의 기억은 서로 단절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끊임없는 진동을 서로에게 전달하며 은밀히 연결되어 있다. 전반부와 후반부에 같은 이름으로 각각 등장하는 2명의 에르난(전반부의 젊은 에르난은 후안 파블로 우레고, 후반부의 중년 에르난은 엘킨 디아즈가 맡았다)이나 마지막에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우주선도 이 연장선 위에 있다. 이 지점에서 ‘기억의 흔적’을 탐사하는 고고학이 <메모리아>의 중요한 방법론으로 등장한다. 
 고고학은 항상 표면의 역사에서 밀려난 비어있는 공간들을 파헤친다. 하나의 안정된 체계 배후의 대안적인 감각을 끌어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고고학은 예술에서 일종의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영화에서는 장 뤽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들)>(1988~1998)에 대한 대담집인 『영화의 고고학』에서 그 활용의 비평적 방향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영화에서 고고학은 “여기저기 산개된 순간이나 기념물로부터 시작해 거의 우연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을 구축”6)하는 것으로 활용되었는데, 고다르가 이것을 기존 이미지와 텍스트 간 이질적 인용과 재결합을 통해 자의적인 세계를 만드는 변증법적인 방법론으로 사용했다면, 이를 변주해 아피찻퐁은 고고학을 현실의 다양한 층위 중 하나를 발굴해내어 마치 콜라주를 하듯 덧붙이는 방식으로 활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여러 층위의 시공간을 한 곳으로 묶을 수 있는 방법론이 되며, 그는 이것을 “시간의 발굴”이라고 표현한다.

 

 그의 팀이 공사 중인 터널에서 인간 유골을 발견한다. 이곳 풍경이 늘 움직이면서도 기억을 품고 있다고 언급한 것처럼, 지하세계 역시 상징적이고도 실제적이다. 내 다른 영화에서처럼, 그곳에서 시간의 발굴이 이루어진다. 그곳은 보존된 시간의 증거가 있는 장소이며 이는 영화의 콘셉트와도 연결된다. 거기서 주인공은 어떤 기억의 행방을 찾으려 애쓴다.7)


 <메모리아>의 고고학은 공사 중인 터널과 구멍 뚫린 두개골이라는 두 가지 이미지로 제시된다. 터널과 두개골의 구멍은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가로지르며 연결하는 형식적 교두보인 동시에 제시카가 자신의 기억, 혹은 자신과 다른 층위의 세계 안으로 접속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이다. 여기서 아피찻퐁의 ‘시간의 발굴’이 특이한 점은 그가 발굴하려는 시간이 단지 과거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발굴하려고 하는 것은 존재했던 과거뿐만 아니라 존재 여부가 불분명한 이름 없는 시간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머리에 구멍을 내서 나쁜 영혼을 내보냈다”라는 연구원의 말은 제시카의 머릿속을 울리는 근원 없는 ‘쿵’ 소리와 연결 고리를 이룬다. 양면적인 의미에서, 제시카는 자기 두개골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자기 기억을 들여다보는 동시에, 세계에 스며드는 여러 가능성을 셈해보려는 시도가 준비된다.
 이름 없는 시공간들에 접속하려는 제시카의 시도는 정글에서 에르난을 만나면서 종합되는데,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에르난은 사실상 제시카에게 발굴된 유물과도 같다. 이는 그가 세계에 대한 감각을 온전히 보전하고 있으며, 제시카가 직접 마주할 수 없는 무명의 잠재적인 곳들을 간접적으로 확인시켜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에르난은 교차하는 세계들이 모이는 허브이자 동시에 축적되는 아카이브와 같으며, 제시카는 에르난이라는 터널을 통해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것이 제시카의 치료 방식이다. 그런데 이런 치료 도식에서 우리는 제시카가 품은 하나의 열망을 찾을 수 있는데, 다름 아닌 ‘아카이브 병’적 열망이다. 이름 없는 존재를 눈앞에 현전시키려는 고고학적인 발굴 작업에서 갑자기 제시카와 ‘유령’이 겹쳐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3-2 아카이브 열(대)병
 자크 데리다는 아카이브 자체와 아카이브의 출처를 간극 없이 일치시키겠다는 열망을 ‘아카이브 병 Mal d'archi’이라고 일컫는다. 그는 기억 흔적을 남기고 그것을 구체적 기록으로 작성하는 정신의 내외부적 행위를 ‘아카이브화’라고 설명하는데, 이런 아카이브의 구조에는 원초적 기억을 파내려는 욕망과 기억 흔적인 아카이브를 보존하고자 하는 욕망이 항상 은밀히 공존한다. 그러나 아카이브가 발굴하고자 하는 원본이란 마치 프로이트가 말한 ‘죽은 아버지’처럼 닿을 수 없는 유령적인 존재이고, 이 때문에 ‘아카이브화’라는 행위에는 숙명적인 불가능함이 내재해 있다. 즉, 아카이브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8)
 아카이브 병은 아카이브 내부의 유령이라는 존재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 통찰이란 아카이브에서 아카이브의 근원을 아무리 찾아봤자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근원을 찾아 앞에 위치시키겠다는 열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내부의 염원을 외부 아카이브에 투사하는 이것이 아카이브의 유령이며, 제시카의 여정에 숨어 항상 따라다니다가 아카이브적인 복원 시도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유령이기도 하다. 제시카는 사운드 디자이너인 첫 번째 에르난에게 자신이 들은 소리를 기계적 방법으로 재현해달라고 부탁하며 그녀 자신의 염원을 드러낸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소리의 존재론적 지위로 인해, 재현된 ‘쿵’ 소리는 아무리 제시카가 들은 소리와 한없이 가까워지더라도 완벽히 일치될 수는 없다. 말 그대로, 그 소리는 ‘실재하지 않는, 바람에 떠다니는 기억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소리의 재현 실패 이후 첫 번째 에르난은 그 자취를 감추는데 그 누구도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에르난이 부재하는 자리에서 제시카가 찾은 것은 한 재즈 밴드의 공연 현장이다. 재즈 공연 장면은 제시카가 음악 소리를 바라보는 쇼트와 밴드가 합주하는 쇼트로 마치 등을 맞댄 듯 180도로 나누어져 있는데, 다름이 아니라 이것은 영화 시작의 자동차 경보음 장면처럼 ‘점핑’의 몽타주이며 다른 세계에서 이름 없는 존재를 끌어온 것처럼 연출되었다는 부분에서 후반부 우주선 장면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제시카가 텅 빈 에르난의 자리에서 찾아낸 것은 재즈 밴드의 연주 모습과 음악이라는 기표뿐이다. 이 장면에서 아피찻퐁은 이미 제시카의 탐사 실패를 예견하고 있는데, 그 실패란 곧 원전을 파내겠다는 열망 속 ‘아카이브 병’적인 유령을 마주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의 고고학은 평행하게 병렬로 놓인 층위를 뒤섞는 것이지 중심을 이루는 하나의 고정점을 찾는 방법론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제시카는 단지 ‘쿵’ 소리의 근원 없음과 ‘죽은 아버지’의 환상을 표면적으로 재발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피찻퐁은 이 텅 빈 표면들을 모아 재즈 밴드 연주라는 하나의 장면으로 집약시킨다. 복도에는 여러 연습실의 모습이 보이고 제시카는 그 중 소리가 새어 나오는 한 연습실로 들어간다. 마치 ‘쿵’ 소리를 따라 ‘여기저기 산개된 순간’으로부터 하나의 층위를 발굴해내려는 아피찻퐁의 고고학 작업을 은유하는 듯 구성된 이 장면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건 바로 고고학 발굴 결과로 얻는 것은 체험 배후의 근원이 아니라 다름 아닌 체험의 현전 그 자체라는 것이다. 제시카는 소리의 근원을 찾기 위해 헤매지만 언제나 소리라는 체험 앞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다. 그 간극은 결코 좁혀질 수 없으며, 언제나 ‘무명의 흔적으로서 체험’을 통한 감각만이 떠오를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피찻퐁이 제시카를 실체가 없는 감각, 즉 “배회하는 유령”9)으로 불렀을 것이다. 이런 구도는 후반부의 에르난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4. 기억의 천재들 
 “나 혼자 지니고 있는 기억이 이세상이 생긴 이래 모든 인간이 가졌을지도 모르는 기억보다 더 많을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내 꿈은 당신들이 깨어 있는 상태와 같지요.” 또한 새벽이 가까워 올 무렵에는 “내 기억은 쓰레기 더미와도 같지요.”라고 말하기도 했다.10)

-보르헤스, 기억의 천재 푸네스 中-

 

 아카이브의 화신과도 같은 후반부의 에르난은 보르헤스의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단숨에 연상시킨다. 푸네스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기 감각들을 기계적으로 완전히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으며 그 능력으로 인해 세계를 일반화하고 추상화하는 소위 ‘플라톤적 사고’가 거의 마비되다시피 한 인물이다. 마치 신화에서나 나올 듯한 완전 기억력은 세계를 분절할 수 없는 긴 지속의 흐름으로 치환시키고 끝없이 신비의 영역을 만들어낸다. 또한 그 지속의 기억은 푸네스를 결코 카이로스적인 세계로 나아갈 수 없도록 막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능력은 제시카가 길을 잃도록 사고를 마비시키지만, 동시에 제시카가 그 ‘길 잃음’을 통해 잠재적인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여정의 끝과 마주할 수 있도록 한다.
 자신을 ‘하드디스크’라고 소개하는 에르난이 가진 밑도 끝도 없는 기억의 아카이브는 그를 마치 기록매체처럼 보이게 하는데, 이것은 그가 영화의 화신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메모리아>를 ‘영화에 관한 영화’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전반부의 에르난이 편집실에서 행하는 재구성은 사실상 영화의 구성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환영적인 측면을 암시한다. 그리고 후반부의 에르난은 자신이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감각을 시간의 흐름과 함께 통째로 기억의 아카이브에 저장해버리며, 영화의 카메라도 마찬가지로 세계의 빛과 시간을 그대로 흡수해버린다. 자신의 영화를 영사하기도 하며 관객으로서 다른 존재의 영화를 보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에르난의 아카이브(혹은 영화관)에도 앞서 언급한 제시카의 ‘유령’은 항상 그 여정을 같이 하는데, 그 유령이란 영화라는 매체 안에 은밀히 숨어 있는 ‘미라 콤플렉스’11)적 욕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에르난의 꿈 없는 잠 장면은 마치 푸네스가 말한 ‘쓰레기 더미’의 영화적인 재현과도 같은데, 몇 분 동안 지속되는 장면에서 관객들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마치 멈춘 듯한 화면과 끊임없이 들려오는 주변적인 소리뿐이다. 에르난은 이것을 ‘꿈 없는 잠’이라고 표현하지만, 제시카는 그것을 곧 ‘죽음’이라고 번역한다. ‘꿈 없는 잠’과 ‘죽음’ 둘 다 더 이상 시간이 의미를 갖지 못하는 영역이고, 한 인간의 체험과 기억이 말소되고 중단되는 곳이다. 에르난의 꿈 없는 잠을 보는 제시카와 관객은 ‘쓰레기 더미’와 ‘죽음’이라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영화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죽음’이란 <열대병>의 호랑이나 <징후와 세기>의 검은 구멍이 그랬던 것처럼 흡수의 이미지이다. 혹은 재즈 밴드라는 텅 빈 기표를 걷어냈을 때 픽션 구조에 나타나는 공백과 같은 것이다. ‘쿵’ 소리라는 체험 혹은 기표 아래의 의미는 없다는 것, 다시 말해 에르난이 가진 완전한 기억 아래에서는 어떠한 의미화도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푸네스의 논리’가 곧 ‘죽음’이다. 아마도 이 지점이 디제시스 안에서 제시카가 자신의 유령을 발견한 장소일 것이다. 그녀는 에르난이라는 살아있는 아카이브를 찾았으나 또한 그 아카이브의 ‘죽음’도 발견한다. ‘기억의 발굴’을 행하지만 완전한 기억의 에르난 안에서조차 기억이 중단되는 공간을 마주한다. 이런 은폐와 말소의 움직임에서, 생명의 의미를 침식하는 죽음의 공허를 발굴해낸 것이다. 제시카가 병균과 꽃의 상호작용을 말하며 연구하는 설정은 이런 면에서 결코 동떨어진 요소가 아닌데, 병균이 꽃에 침투하듯 ‘쿵’ 소리는 제시카에게 침투하고 그 증상은 어떤 의미화도 거부한 채 생명을 흡수하려고 한다.
 그리고 ‘쓰레기 더미’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 시간이 흘러가며 관객은 영화의 표면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아피찻퐁의 영화적 방식이다. 표면 아래의 공백을 마주하는 과정에서조차 영화라는 표면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사진처럼 멈춘 듯한 그 장면이 마법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시간의 공백 상태인 에르난과 그를 바라보는 관객(그리고 제시카)가 느끼는 시간의 흐름이 엇갈리며 빚어낸 강렬한 대비 때문이다. 아피찻퐁의 롱테이크 동안 서서히 달라지는 빛, 변모하는 그림자 그리고 외화면에서 침입해 들려오는 소리는 영화라는 세계의 시간이 결코 멈추지 않았음을 넌지시 알려준다. 이 ‘쓰레기 더미’ 같은 잉여적인 흐름이 결국 의미화를 정지시키는 ‘죽음’을 가능하게 하지만, 이 두 가지 측면은 감각과 움직임만으로 세계를 표상하게 하는 영화의 강력한 픽션 구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의 기계론적인 촬영 방식은 영화 자신을 현실인 동시에 허구인 존재로, 진실인 동시에 거짓임이 동시에 가능한 모순적인 매체로 위치시키는 것이다.
 아카이브와 기록매체에 쌓인 ‘쓰레기 더미’와 ‘죽음’의 논리가 말하는 것은 모순과 소통의 불가능성이야말로 관객과 이미지를 조우시키는 영화의 작동 원리라는 것이다. 허울뿐인 세계와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이 풀어내는 환상이 영화를 지탱하는 동력이며, 결국 이 원리는 허구와 현실의 연결이라는 점에서 제시카의 치료 여정과 겹쳐 보인다. 제시카는 자신의 여정이 ‘쿵’ 소리의 근원이 있는 곳에 도달함에서가 아니라 그 근원을 결코 밝힐 수 없음을 깨달음에서 끝난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쿵’ 소리의 근원을 찾아 나아가던 그녀의 여정은 커다랗게 우회하며 ‘쿵’ 소리라는 체험 자체 앞에서 끝난다. 그래서 <메모리아>는 치료하지 않은 채 이미 치료된 여정이며, 제시카에게 체험 근원으로의 접속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체험 앞에서 그녀는 단지 그것을 받아들이는 ‘안테나’가 될 뿐이다. 유령적 공간을 마주하고 단지 이 마주함을 넘어 사실 우리가 죽음을 품은 일종의 유령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이것은 결국 경험과 감각들을 화해시킬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인 동시에 영화 매체의 한계)를 혹은 왜곡되거나 불확실한 상태로 튀어나오는 우리의 기억을 긍정할 수밖에 없다는 인정의 태도이다. 
 이런 관점에서 에르난의 집은 제시카에게 곧 영화관이 된다. 제시카가 에르난의 몸에 손을 가져다 대자 그의 기억들이 그녀에게 공유되기 시작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 기억의 내용 자체가 아니라 기억이 관객에게 불완전하게 공유된다는 형식적인 측면이다. 오직 둘의 대화와 웅웅대는 소리만이 기억의 공유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조심스레 드러낸다. 애초에 영화관이란 어떤 공간인가? 그곳은 관객이 외부 세계의 감각을 최대한 배제한 채 영화의 경험과 온전히 접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단절과 재경험의 공간이 아닌가. 영화관이야말로 보는 자와 스크린이라는 두 세계의 균열을 묶어 재구성한 장소이다. 이런 면에서, 제시카와 에르난의 이 접속은 둘의 동화라기보다 차라리 불화에 더 가깝게 보인다. 다른 시간을 간직한 두 단층(제시카-에르난 혹은 관객-스크린)이 충돌하며 발생하는 불화와 소음. 이것이 앞서 언급한 ‘두 세계 간의 균열,’ 다시 말해 ‘쿵’ 소리 아닐까.


5. 모순을 긍정하는 집단적 체험
 결국, ‘쿵’ 소리는 화해할 수 없음이 본질인 소음이다. 그래서 <메모리아>의 중심적인 질문은 ‘이 불확정성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로 변모한다. 제시카는 자신에게 흘러들어오는 기억을 보며 “나는 이곳에 없었어요”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린다. 분명 그녀 앞에는 ‘이곳’의 광경이 펼쳐져 있지만, ‘이곳’은 그녀가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실재’와 ‘기억의 흔적’ 사이의 이 건널 수 없는 깊은 간극은 제시카와 에르난 모두 메울 수 없다. 그래서 아피찻퐁은 그 간극에 우주선을 놓는다. 
 그는 우주선이 무슨 논리적 의미를 지니는지 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다만, 우주선에 관한 여러 시선이 어떻게 공존하느냐에 대해서 차라리 관심을 둘 것이다. 우주선은 차라리 “수정란” 같은 것이어서 어떤 고정된 한 형상으로의 가능성만을 품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열린 방향으로 무한히 변모하며 분화할 잠재력을 품은 채로 머문다.12) 이미 소멸한 존재와 실현되지 않은 존재의 간극을 오가며 중계하는 탈존의 사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우주선일까? 그것은 우주선이 전복의 제스처를 지니기 때문이다. 우주선이 ‘쿵’ 소리를 내며 웅웅거리다가 떠올라 대기 밖으로 날아가는 장면은 마치 우주선이 제시카가 듣는 소리의 근원인 양 구성되어 있지만, 관객들은 그 터무니없는 광경 앞에서 문제의 해답을 얻기보다는 오히려 황당한 기분만 가지게 될 뿐이다. 우주선은 맥락에 어긋난 비합리적인 존재이지만 오히려 그 비합리성이 우주선의 본질이다.
 아피찻퐁의 세계는 사람과 유령, 서로 다른 시공간들이 혼재하면서 ‘함께 할 수 없는 존재들이 함께하는 세계’이며, 그는 이질적인 것들을 결합하는 고고학적인 몽타주를 행한다. 그 결합의 기저에는 항상 현실과 상반되는 모순들이 깔려 있겠지만, 우주선은 이 모순과 체험 사이의 길을 폭발시켜 전복해버리는 장치로 선택되었다. 그 전복이란 일종의 초현실주의적인 유머로, 명목적인 현실과 주관적 환상 사이의 차이를 들추어낸 후 공존시키는 것이다. 황당무계함과 담담함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것 혹은 완벽한 허구적 존재가 내 눈앞에서 확실하게 현존하는 광경 그 자체를 마주시키는 것이 우주선의 임무이다. 이로써 관객과 제시카는 경험의 모순이라는 논리 앞에서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모순 자체의 체험 앞에 설 수 있게 된다. 제시카는 모순의 해소가 아닌 모순 간의 공존을 경험하며, 증상이 소멸하는 대신 치료의 필요성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즉, 우주선의 광경은 세계의 불가해함 자체의 물화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는 이 확실한 체험 앞에서 응축된 모순 자체를 긍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주선의 이미지는 자신들 아래에 우글거리며 서로 얽힌 잠재적인 시공간들을 직접적으로 암시하며 빨아들이고 그것을 관객에게 발산하는 폭발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정돈된 질서에 의문을 던지고 끊임없이 다른 존재들을 틈입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가 무한히 접합하며 뻗어나갈 수 있다는 ‘상상’의 힘을 지녔다고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주선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고, 그 안에는 도대체 누가 타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공허한 질문이지만 역설적으로 그 여백 덕분에 영화는 모든 곳을 잇는 몽타주 기계로 완성될 수 있다. 우주선이 지나간 후, 앞서 영화에 나왔던 군인들, 고고학자, 에르난이 쇼트마다 차례로 등장하고 정글과 구름 낀 하늘의 풍경 쇼트들도 나타난다. 여기서 쇼트에 나타난 대상들이 같은 층위의 세계에 놓인 존재라고 단언할 수 있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제시카의 상상일 수도 있고 제시카가 있는 세계의 현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다른 층위의 존재들을 잇는 경험을 구성하는 것이 아피찻퐁의 영화적 전략 아니었던가.

 

비어짐은 다른 이의 기억을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듣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의 상태다. 우리는 언제나 나 자신과 나의 집, 나의 건강, 내가 사랑하는 것들만으로 생각을 채우려 한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향하는 생각의 힘을 잠시 내려놓으면 비로소 다른 이, 더 나아가서는 다른 종과 연결되는 감각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러한 감각을 이끌어낼 수 있다.(...)

영화를 만들 때는 수많은 삶과 얽히게 된다. 정치적 입장을 표현하는 것도 자유롭지 않다. 미술 작업은 “이것이 내 목소리야”라고 말하는 느낌인 반면 영화는 좀더 집단적인 기억에 관한 것이다. 물론 영화에도 여전히 정치적인 것이 있지만 사회적인 기억, 성적인 규범과 얽혀 있다.13)


 ‘비어짐’을 통해 ‘집단적 기억’들이 ‘연결되는 감각’을 이끌어 내는 것. 여기서 중요한 점은 연결이란 항상 기억과 감각을 경유하여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관객들은 <메모리아>의 ‘쿵’ 소리를, 재즈 밴드의 음악을, 에르난이 꿈 없는 잠을 자는 동안 마치 멈춘 듯한 그 시간을 그리고 대기권으로 향하는 우주선을 함께 머물면서 체험하는 것이고, 아피찻퐁은 그 감각의 빈 칸을 자신이 채우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이 스스로 채우도록 구성함으로써 그들을 이 ‘집단적 기억’ 안으로 편입시킨다. 이것이 <메모리아>를 ‘집단적 상상을 체험’하도록 설계된 영화라고 부르고 싶은 이유이며, 또한 많은 관객과 평론가들이 아피찻퐁의 영화를 본능적으로 ‘체험의 영화’라는 수사학으로 이름 붙인 이유라고도 말하고 싶다. <메모리아>는 실체에 다가가길 끝없이 거부하고 집단적 상상을 계속 덧붙이는 데 집중하는 영화인 것이다.
 안토니오니의 <욕망>(1968), 코폴라의 <컨버세이션>(1974), 샤브롤의 <의식>(1995), 올리베이라의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건>(2010)... 많은 영화에서 유능한 연출자들은 기록매체의 감각을 바탕으로 현실을 추격하려는 시도의 실패를 항상 모종의 형태로 놓아두었다. 이것은 어쩌면 영화 기계의 가장 가까이에서 작업하는 그들의 무의식 속에는 세계를 기록하려는 충동과 그 충동이 허약한 토대 위에 서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불안이 항상 대치하며 소음을 일으키고 있으며 그 파열음이 우리에게 은밀하게 들리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메모리아>는 그 충동과 불안을 대결시키는 게 아니라 그 간격 사이에 상상적 공간을 지음으로써 끝내 공존시키려고 했다는 점에서 독특한 지위를 가지는 영화이다. 체험, 모순 그리고 상상을 괄호 쳐서 묶은 이것이 곧 영화라고 <메모리아>는 보여준다. 체험을 긍정하는 곳에서 모순적으로 나타나는 상상의 힘. 결국, 상상이란 비어있는 곳으로의 여정이며, ‘쿵’ 소리는 기억의 파열음이다. 그리고 이 기억의 파열음은 아마 우리가 영화라는 매체를 보는 한 영원히 우리의 곁을 떠돌면서 소리칠, 영화의 신음일지도 모른다. 

 

 

1) 김호영,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열대병〉에 나타난 시간성 연구」, 『서강인문논총』 43,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5.8., 367-394쪽.
2) 정성일, 「쾅 소리가 나던 날 새벽 나는 홀로 문득 깨어났다 혹은 원숭이의 점핑에 관하여」, 『FILO』 23, 2021.12., 64-83쪽.
3) 스탠리 카벨, 『눈에 비치는 세계』, 이두희 역, 이모션북스, 2014, 53쪽.
4) 유운성, 『유령과 파수꾼들』, 미디어버스, 2020, 203쪽. (유운성은 프랭크 커모드의 논의를 빌려 픽션을 크로노스를 카이로스로 전환하는 구조이자 기술이라고 소개한다. 픽션이 이러한 구조라면 그 안에 세계의 우연성을 형식화하지 않고 자신의 구조에 포섭할 수 있는가? 아마 쉽지 않겠지만, 적어도 우연을 대상으로 삼는 대신 끊임없이 픽션의 구조에 구멍을 내며 그것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운동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어떤 픽션은 스스로를 전복시킬 가능성을 끊임없이 자신의 구조 자체에 틈입시키며 변동을 중개할 능력을 지닌다. 이런 전복의 가능성을 지닌 픽션은 불확정성을 자신의 형식에 내재적인 것으로 지니며, 후술하겠지만 <메모리아>도 이 연장선 위에 놓여있다고 말할 수 있다.)
5) 「“관건은 존재다” 〈메모리아〉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인터뷰」, 『FILO』 21, 2021.8., 44쪽.
6) 장 뤽 고다르·유세프 이샤그푸르, 『영화의 고고학』, 김의석 역, 이모션북스, 2021, 67쪽.
7) 「“빛과 소리를 흡수하는 영혼 같은 것” 영화감독 아피찻뽕 위라세타쿤 인터뷰」, 『FILO』 13, 2020.3., 114쪽.
8) 이종흡, 「서양 기록학계의 기억담론 - 아카이브 병을 전후로」, 역사와 경계 109, 부산경남사학회, 2018.12., 453-487쪽.
9) 「“빛과 소리를 흡수하는 영혼 같은 것” 영화감독 아피찻뽕 위라세타쿤 인터뷰」, FILO 13, 2020.3., 115쪽.
10)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송병선 역, 민음사, 2011, 143-144쪽.
11) 앙드레 바쟁, 『영화란 무엇인가?』, 박상규 역, 사문난적, 2013. (미라 콤플렉스란 죽음에 대항해 시체를 방부시켜 영원히 보존하려는 무의식적 욕망, 즉 시간을 극복하려는 욕망이다. 바쟁은 미라 콤플렉스가 조형 예술의 역사 기저에 항상 숨어 있었다고 주장하며 사진 매체가 미라 콤플렉스의 ‘환영 욕망’을 완성시켰다고 평가했다. 시간에 의해 스러지는 유한한 존재의 영원한 방부를 염원하는 미라 콤플렉스는 ‘아카이브 병’이 영화라는 아카이빙 매체 앞에서 고도화된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12)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역, 민음사, 2004, 249쪽.
13) 「[인터뷰] ‘메모리아’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 “환영의 안쪽을 가장 투명하게 들여다보는 영화”」, 씨네21, 2023.1.5. (https://www.cine21.com/news/view/?mag_id=101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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