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문은 논문과 다르거나, 적어도 다르기를 추구한 흔적을 지녀야 한다. 「당신이라는 비밀 - 이병률론」의 필자는 이게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그가 바로 그런 글을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문은 논문이 아닌 것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많이, 에세이도 아니어야 한다. 평문의 심장 역시 논증이라는 형식으로 뛰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병률은 독자가 ‘읽게’ 된 시가 아닌, 독자가 ‘있게’ 된 시를 쓰는 시인이다. 그는 시를 써서 ‘당신’을 비밀의 일부로 남긴다.” 이런 인상적인 문장은 개념과 논리가 제 할 일을 충실히 끝낸 뒤에, 개념과 논리로 다 말해지지 않는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고지하기 위해서만 과묵한 천사처럼 내려앉아야 한다. 이 글의 필자가 이론의 영역으로 더 깊이 진입하기를 기대한다. 이론은 비평의 에스페란토어고, 그 인공어를 익히며 비평가는 공론장에 입장한다. 비평가와 작품이 사적 사랑 관계 안에 고립되면 작품은 너무 커지거나 작아진다. 

「“광주 이후”를 걸어가기 - 박솔뫼 소설에 등장하는 광주 표상」은 완벽한 서론을 시작으로, 긴장이 흐트러지거나 어조가 흔들리는 법 없이, 끝까지 유려하다. 어느 정도냐 하면, 동의하지 못한 것조차 동의했다고 착각하게 될 정도다. 필자는 이 작가가 선택한 문학적 노선을 자주 배타적으로 특권화하다가(“유일한”이 몇 번 나오는지 세어볼 수도 있을 만큼), 다음과 같은 문장에까지 이른다. “그러한 의미에서 박솔뫼의 산책은 ‘광주 이후’를 살아가는 주체가 감행할 수 있는 최대한의 능동성이 된다.” 여기서 이 글은 대상 작가에게도 감당하기 힘든 짐을 지우는 것처럼 보이고, 80년 광주를 대상으로 한 문학적 실험이 더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동의하긴 어려웠다. 그러나 이런 입장 차가 심사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이 뛰어난 글을 가작에 머물게 한 객관적인 결함은 거의 같은 이슈를 다룬 (2019년 대학문학상 수상작을 포함한) 기존 평문들과 성실히 대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비평가는 연결한다. 연결되면서 각자의 자리가 분명해지도록 만드는, 배치의 예술가다. 이미 있는 연결이 발견된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것조차 연결을 창조한 자의 권능일 수 있다. 「집단적 상상으로의 여정 -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메모리아>」의 필자가 대상 작품을 ‘영화의 고고학’(고다르), ‘아카이브 열병’(데리다), ‘기억의 천재’(보르헤스) 등과 연결하면서 그렇게 했듯이 말이다. 그 과정에서 이 영화의 모든 단서는 “영화에 관한 영화”라는 해석의 틀로 주밀하게 흡수된다. 그러나 이 영화가 자기 자신이 영화라는 사실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초시간적/간주관적 집단 기억의 공유’라는 명백히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테마조차 ‘영화적 체험’이라는 매체론적 틀로 처리하는 이 글의 후반부는 그래서 아쉽다. 물론 수상자는 이 아쉬움을 해결하려면 또 한 편의 글이 필요하다고 정당하게 반박할 수 있다. 수상을 축하한다. 당신 안의 비평가가 최소한 부업이나 취미의 형식으로라도 살아남기를 소망한다. 

 

신형철 교수(영어영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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