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성 편집장
조은성 편집장

“같이 밥이라도 한 끼 먹고 싶은데, 넌 항상 바빠.” 며칠 전 생일에 주변 지인들로부터 인사말처럼 들은 말이다. 몇 번이나 약속을 잡고 취소하기를 반복하는 염치없는 인간으로 살아왔기에 이제는 마지막 지면 발행을 앞두고 있으니 괜찮다고, 그동안 미안했다고 장문의 사과 답장을 보냈다. 한 치의 거짓도 보태지 않고, 이번 학기만큼은 단 한 명의 친구도 사석에서 만나지 못했다. 신문사에 갇혀 매일 장시간 일하고, 팀플과 학회 회의가 끝나면 도서관에 남아 밤 11시까지 한 아름 빌린 책들을 속독해 가며 과제를 작성하고…. 그냥 ‘바빴다.’

그래도 이따금 바쁘다는 사실이 유능함을 증명한다는 생각에 내심 자부심을 가지기도 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조직이 있다는 것이, 멋진 마케팅 학회와 연구소에 소속돼 공부한다는 사실이 나의 경쟁력을 보증해 준다는 마음.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사실만이 후에 취업 시장에 직면할 나 자신에게 떳떳함을 준다고도 믿었다. 그러나 문득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자유 시간이 단지 할 일과 다음 할 일 사이 엄청난 보상처럼 주는 15분간의 유튜브 시청뿐이라는 것을 자각했을 때, 견디지 못할 만큼 허무했다. 어느덧 하루에 대한 통제권이 내 손아귀를 벗어난 것이다.

나의 이야기가 다소 극단적인 사례일 수는 있지만, 주어진 24시간을 밀도 높게 채우려는 심리와 그로 인한 번아웃 현상에 관한 문제 제기가 허무맹랑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의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통제권을 의미하는 재량시간(discretionary time)의 경우 한국이 OECD 평균에 비해 한참 부족하다는 문제는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 2020년 기준 한국의 25~54세 주당 노동 시간은 15개국 가운데 가장 긴 41.8시간이다. 이런 와중 오히려 일하지 않으면 불안하다는 응답도 47.5%에 달했다. 바쁨을 종용하는 사회에 적응해 버린 개개인이 이제는 ‘쉬지 않고 무언가를 계속 쥐고 있는 상태’에 빠져버린 것이다.

이런 사회 문제적인 풍토를 일상의 영역으로까지 수용하기 시작하는 청년 세대의 경향도 눈에 띈다. 자신의 하루를 더욱 강박적으로 ‘쪼개는’ 식으로 말이다. 이미 시간의 ‘가성비’를 따지는 일, 탭 여러 개를 동시에 펴 놓은 채로 여러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일은 익숙하다. 심지어 대학내일20대연구소에 따르면 한국 Z세대는 ‘시간을 의미 있게 사용하기 위해’(40.2%) 자신의 일상 루틴을 공유한다고 한다. 이를 보여주듯 공유하는 루틴도 어학·예체능·재테크 등의 생산적인 활동이 대부분이다. 여가마저도 효율과 투자의 관점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 청년들의 다소 씁쓸한 일면이 아닌가. 엄격한 절약과 시간 통제에 성공한 하루를 영상으로 올리면 그들의 똑부러진 삶을 동경하는 반응이 끝없이 이어진다. 이런 가성비 여가가 진정 시간에 대한 우리의 통제력을 보여줄까?

한 해의 마무리까지 채 한 달이 남지 않은 이번 연말이야말로 자신이 ‘시간’을 소비하는 방식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할 테다. 다음 해를 어떻게 채워갈지 막연히 기대하기보다, 먼저 올해 보낸 자신의 시간을 반추해 보는 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올해 시간의 밀도와 강도는 내게 적합했는지, 진정 ‘나’를 위한 쉼과 투자에 얼마만큼 어떻게 시간을 써 왔는지 말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보다 근본적으로 ‘왜 한국 사회는 이렇게 바빠야만 하는지’ 함께 생각하는 테이블도 마련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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