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과·21)
(사회학과·21)

가벼운 검진을 받기 위해 방문했던 동네 보건소에서 한 학생과 그의 보호자를 우연히 봤습니다. 그들은 접수 데스크에서 간호사 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학생은 정상적인 언어를 구사하기 힘들어 보였습니다. 그는 계속 반복적으로 의미 없는 소리를 낸다거나, 가만히 서 있지 못하고 주위를 왔다 갔다 배회했습니다. 저는 학생이 낸 소리에 그들을 쳐다본 후 애써 눈길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고, 같은 로비에 있던 사람들은 힐끔힐끔 곁눈질하거나 그 상황이 신기한 듯이 빤히 응시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응시한다는 표현보다 구경한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난처해하는 간호사와 보호자의 보이지 않는 노고와 일상생활이 힘들 학생 모두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고, 채 5분이 되지 않아 저의 이름이 불려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문득 저는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을 그 짧은 시간 관찰한 결과로 그에게 중증의 병이 있다고 결론짓다 못해 그들의 일상과 감정을 저의 관점에서 멋대로 헤아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정신의학협회에 따르면 자폐증은 ‘사회적 의사소통 및 상호작용’과 ‘제한적이고 반복적인 행동과 흥미’의 측면에서 결함을 보이는 신경 발달장애로 정의됩니다. 예전에 자폐증 증상을 보이는 환자들은 주로 지적장애나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정서 문제 등으로 진단됐지만 최근 이들이 자폐증으로 분류되기 시작하면서 그 수가 급격히 증가했는데, 이는 질병을 진단하는 행위에는 기준이 체화된 전문가의 시각이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자폐증에 관한 연구가 최근에서야 시작된 한국은 소아과학 분야에서 많은 시간 동안 다양한 훈련과 교육, 임상경험, 해외의 진단 전문가와의 협업을 이룬 의사들만이 자폐증을 볼 수 있는 눈을 체화하고, 성문화된 진단 기준을 토대로 환자들을 진단합니다.

그런데 이 진단이라는 의료 행위에 의사들은 매우 신중하게 접근하는데, 진단은 환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뿐 아니라 새로운 사건과 행위들을 발생시키기 때문입니다. 현재까지 자폐증은 유전적 소인에서 시작되는 장애로, 치료 방법이 없는 불치병입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자폐증을 진단하면 이는 당사자와 보호자에게는 바뀌지 않는 대법원의 판결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에 따라 환자는 공식적으로 장애라는 사회적 범주에 포함돼 사회에서 관리되고 보호자는 결과를 부정 혹은 회피하거나, 증상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등 다양한 행위가 뒤따릅니다. 이렇듯 질병은 생물학적 영역에서 존재하는 실체지만 오히려 사회적인 특성을 많이 가지는 듯합니다. 질병을 다루는 행위는 관련된 다양한 행위자와 당시의 지식과 기술, 사회적 관계 속에서 그 의미가 계속해서 변화하고 다중적으로 존재하는, 규범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시간과 장소 속에서 ‘나’를 중심으로 사람들과 교류하며 살아갑니다. 개중에는 형식적인 겉치레 말로 자신을 드러내거나 공감의 언어를 던지기도, 혹은 매체를 통해 일방적으로 전해지는 연예인의 정보로 그의 성품을 평가하기도, 심지어는 서로 얼굴과 이름도 모르는 타인과 인터넷상에서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 비난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타인과 그들을 둘러싼 사건들을 자신의 편협된 시각으로 수없이 진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사들이 많은 시간과 준비를 들여 조심스럽게, 비록 그 말이 차갑더라도 연민과 협력의 의지를 담아내는 진단 행위를, 우리는 너무나 쉬운 방식으로 행하고는 합니다. 물론 끊임없는 자극과 정보가 흘러넘치는 이 세상에서 주관적인 가치에 근거해 사회를 바라보는 행위는 일종의 자기방어 기제로 작동하게 된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으로 해석한 타인에게 내뱉는 말과 작은 몸짓은 그에게는 새로운 질병을 발생시키고 커다란 감정과 행위를 일으킵니다. 온갖 질병이 만발하는 병원에서 결국 진찰받는 환자는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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