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나윤경 교수(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기고

지난해 9월 연세대 ‘사회문제와 공정’ 강의를 개설한 나윤경 교수(연세대 문화인류학과)와 해당 강의 수강생 13인의 글을 엮은 『공정감각』이 출간됐다. 저서는 학내 온라인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을 민주적 공론장으로 만들기 위한 학생들의 경험을 담았다. 『대학신문』은 이 책의 저자 나윤경 교수가 강의를 기획한 배경과 저서를 통해 소통하고자 하는 공정이 무엇인지를 담은 기고문을 실었다.

 

나윤경 교수(연세대 문화인류학과)
나윤경 교수(연세대 문화인류학과)

2023년 9월, 13명의 학생과 함께 엮은 책 『공정감각』이 출간됐다. 학내 온라인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에 남아 이용자들의 다양한 비판과 공감으로 확장되고 진화했어야 할 생각들이 ‘썰리고’ 퇴출당하는 바람에 책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진화의 의미 그대로,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하등한 것에서 고등한 것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13명의 생각을, 오히려 변화가 두려운 듯 잉크로 ‘박제’해 책으로 남기게 된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거의 모든 대학교 에브리타임에서 자주 볼 수 있듯이 대학이라는 공간에서조차 구성원의 생각이 지적으로 소통되고 부딪히는 과정을 거치며 진화하지 못하는 것을, 아니 구성원 스스로 그 진화를 ‘막아서고’ 있는 것 같은 이 현상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더 정확하게는 익명 뒤에 숨어,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생각에 대해 질문하기보다 폄훼, 조롱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신고, 삭제하고 그럼으로써 혐오가 거리낌 없이 표출되는 이 현상을 대학 구성원, 특히 에브리타임 ‘애용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질문과 답변, 정확한 논거와 설명 등의 과정을 노정하며 익명의 상대일지라도 설득하고 그에게 설득당하기도 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층위로 자신의 사유를 끌어 올려 인식의 ‘전환’(transformation)과 성장을 경험하는 과정이 바로 대학, 그 공간의 존재 이유라면 애용자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1. “대학의 죽음”

2022년 1학기, 대학생 세 명이 시급 440원 인상, 인원 충원, 그리고 샤워실 설치를 요구하는 교내 청소노동자 집회가 수업권을 침해한다고 638만 원의 손해(수업료+정신적 손해배상+정신과 진료비)를 배상하라며 소송을 했다(그중 한 명 취하). 집회 미신고 등의 혐의로 노동자들을 고소도 했지만, 곧 무혐의 처분됐다. 손해배상에 대한 민사소송에서 법원이 지난 2월 6일 진행된 1심을 통해 원고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기각했고, 소송 비용도 원고 측이 모두 부담하라 판결했다. 이에 26명으로 구성된 노동자 측 무료 법률 대리인단은 “공동체에 대한 연대 의식 없이 오로지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확인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원고 측은 “민주노총 각 대학 청소노동자 지부의 조직적 불법 행위를 면책해 준 시대착오적 판결”이라고 반발하며 1심 판결 다음 날인 2월 7일 항소했다.

2022년 당시 학생들의 청소노동자에 대한 소송 소식에, 김누리 교수(중앙대 독어독문학과)가 이 문제와 관련해 표현한 “대학의 죽음”을 직접 본 듯 섬뜩했다. 이에 따라 고등교육기관 구성원은 물론 민주 사회를 지향하는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기본 소양으로 갖고 있어야 할 사회 윤리적 덕목, 정의와 공정에 대한 감각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왜곡돼 있음이 드러났다. 그렇게 뒤틀려진 그대로 ‘사회적 약자’에게 적용돼 이들의 입지를 더욱 약화함으로써 한국 사회 구성원이 지향하는 줄로 믿었던 ‘민주 사회’는 길을 잃고 표류하고 있음도 드러났다. 단 두 명의 학생만이 소송에 참여했지만, 에브리타임에서 그들을 지지하는 다수 20대의 존재는 길 잃은 한국 사회 미래의 암울한 면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들은 ‘성장이 멈춘 꼰대’들과는 비교되지 않을 성장 잠재력이 충분한 20대이기에, 긴급한 교육적 개입을 위해 2023년 1학기 교양과목 ‘사회문제와 공정’을 개설하기로 했다. 다음은 그 수업계획서의 일부이다.

 “...학생들의 수업권 보장 의무는 학교에 있지 청소노동자에게 있지 않음에도, 학교가 아니라 지금까지 불공정한 처우를 감내해 온 노동자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이들의 공정감각이 누구를 향한, 혹은 누구에게 향했어야 할 감각인지 묻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뿐만 아니라, 그 눈앞의 이익을 ‘빼앗은’ 것으로 호도된 사람들을 향해 에브리타임에 쏟아내는 혐오와 폄하, 멸시의 언어들은 과연 이곳이 지성을 논할 수 있는 대학이 맞는가 하는 회의감을 갖게 한다. (중략) 이러한 맥락에서 본 수업을 통해 에브리타임이라는 학생들의 일상적 공간을 민주적 담론의 장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을지 모색하고자 한다...” 

청소노동자들에게 “그렇게 불만이면 다른 일자리를 찾으면 되지 않느냐!”라는 에브리타임 속 주장과 열렬한 호응은 부모님의 어릴 적 허기진 일상을 듣던 꼬마가 “집에 쌀이 없어 그렇게 배고팠다면 빵이나 라면을 먹지 그랬어?”라고 물었다는 사연만큼 어처구니없다. 빈곤이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구조’를 읽을 리 없는 꼬마처럼 무지할 수도, 무지해서도 안 되는 대학생들이 지식과 지성으로 비판하고, 개선해 나가야 할 노동에 관한 구조적 모순에서 고개 돌린 것도 모자라 “다른 일자리” 운운하며 ‘훈수’ 두는 무지는 차라리 못 봤으면 했다. 수업 ‘사회문제와 공정’에 대해 “대한민국의 지성인이라고 불리는 젊은 학생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한 교수의 욕구로 만들어진 강의”라고 쓴 글과 이에 대한 호응에서 보듯, 자신을 “지성인”으로 둔갑시키고, 학생의 인정에 목마른 존재로 교수자의 의미를 왜곡한 안하무인까지 드러낸 이들이기에, 저임금과 열악한 환경 속 청소노동자를 조롱하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자본주의 최신 형태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친자본, 반노동’을 축으로 운용되는 체제로서, 이는 다만 거대자본을 가진 기업이나 자본가뿐 아니라, 소액으로라도 누군가를 고용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노동에 대한 가치를 하향 평준화했다. 예컨대, 대학생들이 하는 중고생 과외가 월급 아닌 ‘시급 노동’으로 간주 되면서 소액의 자본이라도 쥔 부모들은 ‘일류대 선생님’을 ‘싸게’ 고용할 수 있게 됐다. 이번 주 집에 왔던 선생님에게도 당일 치 시급을 쥐여주며 다음 주부터는 오지 말라고 하는 등 언제라도 쉽게 그를 자르고, ‘널리고 널린’ 다른 ‘일류대 시급 노동자’를 더 싸게 고용할 수 있게 됐다. 이 같은 친자본, 반노동이 자연화된 구조 속에서라면 청소노동자뿐 아니라 대학생 그 누구라도 삶의 어느 순간 ‘값싼’ 노동자로 전락하는 것은 물론, 그 상태 그대로 삶을 이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청소노동자에 대한 저임금 등의 부당한 처우는 생의 많은 시간을 노동자로 사는 우리 대부분이 놓여있거나, 앞으로 놓일 노동의 ‘구조적’ 문제다. 노동자에 대한 조롱과 멸시가 아니라 그들을 ‘값싸게’ 취급하는 노동 구조를 함께 비판하고 저항하는 강한 연대(solidarity)가 필요한 이유다.

김누리 교수가 청소노동자 소송과 관련해 일갈한 “대학의 죽음”이란 화이트칼라, 블루칼라 가릴 것 없이 노동자에게 불리해져만 가는 구조적 모순에는 무지한 채, 각자도생으로 높이 오르기만 하면 자기 자신은 안전해질 것이라는 ‘착각’이 대학가에 공기처럼 퍼져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높이 오르기에 유리한 고지로 ‘보이는’ 대학에 도착한 이들은 친자본, 반노동 구조를 함께 비판하고 저항하기보다 그 착각이 만든 무지에 찬 오만으로 아래 있는 듯 ‘보이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향해 조롱의 화력을 내뿜는다. 

 

2. 진화를 멈춘 생각들

독일 태생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1, 2차 세계대전 전범국들의 전체주의는 비판적 사유를 멈춘 이들이 만든 문제이자 전쟁이라는 재앙의 불쏘시개가 됐다. 그 사회 구성원이 속한 거대 권력 구조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유하지 않는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강요하거나 의도적으로 흘린, 진실과는 거리가 먼 탈진실(post-truth)을 그대로 믿으며, 그에 따라 구조가 아니라 어떤 누군가를 열렬히 폄훼하고 타자화하면서 그들만의 공격적 소속감으로 배타성을 강화해 간다. 타자를 향한 이런 배타성이 국가나 민족을 경계로 형성될 때, 역사가 보여줬듯, 경계를 넘는 타자의 도발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려 했다는 권력자의 꾸며진 명분으로 대량 학살과 인종 청소를 동반한 폭력과 전쟁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특정 인터넷 플랫폼에서의 소속감 역시 누군가를 조롱하고 공격하는 타자화 과정으로 만들어진다. 에브리타임을 분석한 연구들에 의하면 대학생 안에서의 그 타자는 각 대학교의 지향, 소재한 지역, 사회적 명성 유무와 관계없이 유사하다. 누군가를 멸시하며 ‘좋아요’를 많이 받아 ‘HOT 게시판’(핫게)에 오른 글에 대해 이견을 내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순간 그 누구라도 타자가 돼 멸시와 혐오 대상이 되는데, 그 타자화의 논리나 내용 역시 각 대학 에브리타임이 서로 닮아있다. 이 때문에 플랫폼에 강한 소속감을 갖는 ‘애용자’들은 혐오적 의견에 질문과 이견, 비판과 대안 제시 등 촘촘한 사유 과정을 따르는 대신 ‘좋아요’로 호응하거나 ‘눈팅’으로 침묵하며 그 공간을 전체주의적으로 몰아간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 사회라면 이처럼 획일화된 플랫폼 역시 인정할 수는 있겠으나, 문제는 이 플랫폼이 사회의 주변부가 아니라 비판적 사유가 꽃 피워야 할 대학에 활짝 열려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공존보다 경쟁을 가르치고 배워 온 한국 사회에서, 공존을 방해하는 구조와 거대 권력(권력자, 권력기관)에 대한 비판적 사고, 이를 통한 민주 시민성 함양이라는 대학의 대사회적 역할을 망각한 에브리타임 애용자 같은 이들의 출현은 사실 놀랍지 않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대학생 스스로가 ‘대학’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다음의 질문에 대해 성찰적으로 답해 봤으면 한다. 고등교육이 다루는 지식과 정보가 유통되는 곳인 만큼, 대학 내 커뮤니케이션 플랫폼 대화의 주제, 형식, 논리가 대학 밖 ‘타자화’로 이뤄진 혐오적 플랫폼들의 그것과 질적으로 다를 수는 없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대학생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에 제대로 답을 하려면 민주 사회 대학 교육 과정의 기본값인 ‘사회 구조와 거대 권력에 대한 비판적 사유’가 가능해야 한다. 이것은 권력이 만든 사회 구조 속 다양한 존재의 공존을 향한 가장 유망하고 현명한 준비일 것이다. 그러므로 고교 졸업생 중 70% 이상이 대학에 진입하는 한국 사회는, 이론대로라면 다른 사람에 대한 조롱과 차별 등의 혐오와 타자화가 가장 드문 사회로서 에브리타임은 물론 사회 곳곳에 공존의 문화가 숨결처럼 느껴져야 한다. 그러나 인터넷에서일망정 대학 구성원의 일부가 사회 구조와 권력이 아니라, 익명의 개인 혹은 페미니스트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같은 정치적 주체를 향해 저열한 생각을 쏟아냄으로써 다양한 사람들의 공존 가능성을 강력하게 막아선다면, 한국 사회에서 대학과 대학생이 존재하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3. 대학의 존재 이유, 권력에 대한 비판적 사유

수업권 침해 문제를 비판적으로 사유했다면, 그 비판의 대상을 청소노동자가 아니라 그들을 반노동적 상황으로 몰아세운 구조와 그 구조를 만든 대학 총장 등 주요 의사결정권자로 했을 것이다. 휘어진 도로라면 전력 질주한다 해도 직선 도로에서 달리는 것만큼 빨리 갈 수 없다. 마찬가지로 청소노동자들이 장시간 열심히 노동한다고 해도 ‘필수노동자’인 그들에게 가족 부양에 턱없이 부족한 임금을 책정한 구조와 그 구조를 만들어낸 권력자가 있는 한, 노동자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전력 질주하는 이에게 불평 말고 더 빨리 뛰라거나, 자동차를 구입해 달리라 말하는 것처럼, 구조인 도로는 그대로 두고 달리는 개인들에게 하는 ‘맥락 모르는’ 훈수는 그 나쁜 구조, 휘어진 길을 강화할 뿐이다. 적어도 민주 사회의 대학과 대학 구성원이라면 할 수 없는 선택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이공계 국립대학 졸업식에서 축사 중인 대통령을 향해 15%나 삭감한 연구개발(R&D) 예산을 증액하라 외친 한 졸업생의 ‘입’이 경호원에 의해 틀어 막혀 끌려 나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대한 에브리타임에서의 반응이 궁금해 몇몇 학생에게 물었더니 권력의 과잉 경호에 대한 비판도 있었지만, “그럼 소란 피우는 게 정상임?” “(경호실 대응이) 과격하긴 했지만 난 가능하다고 생각함” “기획한 거더만ㅋㅋ (녹색정의당) 대변인ㅋㅋ” 등의 댓글이 많다고 했다. 사회 구조와 거대 권력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개인과 정치적 주체에 대한 비난과 조롱이 드러난, 실망스럽지만 권력에 무디고 개인에게 뾰쪽한 에브리타임다운 반응이라 생각했다. 

대학 교육과정이 개인에 대한 비난과 조롱이 아니라 사회 구조와 그 구조를 만든 권력에 대한 비판적 사유임을 강조하는 이유는, 어느 사회든지 고등교육을 마친 ‘엘리트’ 다수가 법과 제도 등 사회적 구조를 만드는 주요 의사결정권자가 돼, 사회 구성원 모두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두에게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성소수자, 장애인, 여성, 유학생, ‘다른’ 캠퍼스 동료, 비정규직 노동자 등 ‘특정 구조’ 안에서 부당한 대우를 당연한 듯 받아 온 개인들이 아니라, 이들이 응당 누렸어야 할 인권, 학생권, 노동권을 앗아간 구조와 권력자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같은 사회적 구조 안에서 다양한 고민을 하고 있을 익명의 또래에게는 깊어질 토론을 위한 질문을, 그리고 이번 이공계 국립대 사건에서 입이 틀어 막힌 학생 같은 개인을 억압하는 권력에는 지성으로 무장한 비판적 사유를 발휘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우리가 대학에 모인,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이유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