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 정치적 올바름의 태동과 한국에서의 PC 논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이라는 용어를 네이버 지식백과 에 검색해 보면 ‘인종과 성별, 종교, 성적지향, 장애, 직업 등과 관련해 소수 약자에 대한 편견이 섞인 표현을 쓰지 말자는 정치적, 사회적 운동’이라는 뜻풀이가 나온다. 하지만 ‘PC 경찰’, ‘PC충’ 같은 조어들은 PC가 약자에 대한 존중의 뜻을 담고 있음에도 부정적인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현재 온라인상의 갑론을박에 남용되는 PC, 그 양상은 어떠하며 건설적인 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PC, 배제되는 소수자를 발견하다

PC는 학술적으로 명확히 정의되는 개념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폭넓은 영역에서 소수자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철폐하려는 사회적 움직임으로 이해된다. 한송희 초빙교수(세종대 문화산업경영 융합전공)는 PC를 “다양한 존재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공존을 지향하는 흐름이다”라고 정의했다. 

PC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학계에서 일으킨 반향과 함께 등장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가 속한 사회구조가 주류 집단이 경제·정치·문화 등 사회의 다양한 영역을 지배한 결과라는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한송희 초빙교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가 평소 당연하다고 여기는 기존의 사회 질서가 실은 권력에 의한 배제로 인해 구성된 결과임을 주장하면서, 제도적 측면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삶에서도 존재하는 소수자에 대한 부조리를 발견했다”라고 설명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 제기는 소수자에 대한 배제를 없애기 위해 다양성과 다름을 존중해야 한다는 다원주의를 현실에서 실천할 필요성을 일깨웠다. 송지우 교수(정치외교학부)는 “서구에서는 1960년대와 1970년대 도덕적 자각의 시기에 사회적 소수자를 포함한 사회 구성원 모두를 존중하는 것이 진정한 사회정의라는 인식이 발생했다”라고 말했다. 이에 그동안 소수자가 배제됐다고 여겨지는 정치·문화·언어 등 전 영역에서 다원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운동으로서 PC가 시작됐다. 

따라서 PC는 주로 제도적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여타의 사회운동과는 달리, 언어와 문화 등 일상적 영역까지 포함한 사회의 전 영역에서 소수자를 대상으로 한 부조리를 교정하고자 한다. 미래정책연구원 이미준 선임연구원은 “70년대 미국 대학가를 중심으로 시작된 초기 PC 운동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담긴 언어 사용을 제한하고 주류 집단인 백인 이성애 남성이 쓴 교재만을 공부해야 하는 커리큘럼에 대항하는 등 문화적 부조리를 교정하는 양상으로 일어났다”라고 설명했다. 

*포스트모더니즘: 이성의 합리성과 객관성에 대한 믿음에 기반한 18세기 근대성에 반발해 생긴 개념으로, 객관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자율성과 다양성을 중시한 문화 운동이자 이념.

 

한국에서 PC는

이처럼 PC의 핵심은 다양성을 존중하는 다원주의지만, 전문가들은 국내 PC 담론에서는 PC가 소수자의 권리 신장을 위한 노력보다는 각 정치적 진영이 서로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로 이해된다고 설명한다. 한송희 초빙교수는 “진보 정치인 혹은 지식인이라고 해서 모든 의제에 관해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니듯이, 한 영역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 다른 영역에서의 올바름도 담보한다는 도덕적 나르시시즘은 옳지 않다”라고 지적했다. 한편 송지우 교수는 진보 진영의 위선을 향한 보수 진영의 비난에 대해 “진보 진영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PC를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사회 변혁을 위한 모든 움직임을 매도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에 경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2016년에 벌어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에는 페미니즘이 사회적 화두로 떠오름에 따라 국내의 PC 담론에서 페미니즘을 둘러싼 논쟁이 주를 이루게 됐다는 견해가 있다. 한송희 초빙교수는 “국내에서는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촉발된 페미니즘에 대한 요구와 PC에 대한 요구 및 반감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가 크게 중첩돼 있다”라고 설명했다. 여성 인권 문제가 사회적으로 가장 뜨거운 사안이 된 시점에 국내에서 PC 개념이 본격적으로 논의되며, PC가 페미니즘과 동의어로 여겨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오정일 교수(경북대 행정학부)는 “서구의 PC 담론은 이민자나 난민, 종교적 소수자 등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를 대상으로 하지만, 우리나라의 PC 담론은 역사적·사회적 맥락상 주로 여성이라는 소수자 집단만을 대상으로 한다”라고 부연했다. 한국은 인종이나 종교적인 갈등이 적었기 때문에 소수자 집단으로 대표된 여성에 대한 PC 담론이 주를 이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페미니즘을 PC에서 추구해야 할 단일한 정치적 올바름으로 내세우는 진영과, PC의 왜곡된 이해를 바탕으로 페미니즘을 매도하는 진영이 대립한다.

최근 국내 PC 담론은 온라인 공간과 문화 영역이라는 한정된 영역에서만 이뤄지면서, PC가 상대 진영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양상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새로운 여성 히어로를 여럿 등장시킨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둘러싼 최근의 PC 논쟁이 대표적이다. 이를 두고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 등지에서는 ‘아메리카 차베즈’, ‘미즈 마블’ 등의 새로운 여성 히어로를 단기간에 여럿 등장시키는 것이 작품의 완성도를 해친다는 입장과, 여성 히어로 서사의 부족을 이유로 이런 캐릭터의 등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 팽팽히 맞섰다. 이미준 선임연구원은 “논의 영역과 참여자의 한정성 때문에 PC에 대한 논의가 갑론을박에만 머물고, 소수자 보호를 위한 실질적인 변화로 나아가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라고 분석했다. 정제호 교수(국립한국교통대 한국어문학과) 또한 “온라인 공간에서 과열된 PC 운동을 둘러싼 논쟁은 대중들이 PC 운동을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움직임이나 다양성을 추구하기 위한 시도가 아니라, 양극단에 있는 사람들의 무의미한 다툼으로 인식하도록 부추긴다”라고 지적했다. 

 

PC 논쟁, 열린 논의로 향하려면

PC 운동이 서로를 공격하는 데 그치는 무의미한 논쟁으로만 남지 않으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한송희 초빙교수는 “PC가 소수자들을 위한 사회 정의로 이어지려면 각 진영이 특정 논쟁에서 일회적 승리를 거두는 데 급급하기보다는 다양한 사안을 관통하는 의제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라고 제시한다. 그는 “문화 이론가 스튜어트 홀 또한 PC 투쟁의 지향점이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를 획득하는 것이라고 봤다”라고 부연했다. 이에 따르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둘러싼 PC 논쟁에서 중요한 지점은 단순히 여성 히어로 출연에 대한 지지나 비난이 아니라, 그동안 남성 캐릭터 중심이었던 영화계에 편견이 작용한다는 문제의식에 대한 사회적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나아가 소수자에 대한 존중의 실현이라는 PC의 본질적 목적을 달성하는 논의가 촉발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견이 위선 혹은 몰상식이라고 매도될 걱정 없이 열린 대화를 시도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의 조성이 필요하다. 송지우 교수는 “어느 사회 운동이나 특정 이념을 사회에 설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에 교조적인 면이 있지만, 특정 사회에서 진보적인 이념일수록 과한 비판을 받기 쉽기에 비판이 무분별한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미준 선임연구원은 “철학자 아이리스 영에 따르면 사회 내 개인은 모두 사회 구조적인 부정의에 책임이 있지만, 이때 필요한 책임은 공개적인 비난이 가해지는 법적·도덕적 책임이 아니라 정치적 책임이다”라고 설명했다. 부정의를 시정하려는 공동의 노력에 참여해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정의를 함께 재구성해 가는 정치적 책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소수자를 포함한 모두의 자유와 권리를 수호하려는 노력인 PC가 이룩하고자 하는 올바름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다원적인 ‘올바름’이다. 정제호 교수는 “반대의 의견을 경청해야 하는 것은 사회가 준 숙명과도 같은 과제다”라고 강조했다. PC 논의가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고 건설적인 논의로 나아가려면, 논의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독선적 태도에서 벗어난 열린 마음으로 함께 ‘올바름’을 끊임없이 재구성해 가야 하지 않을까.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