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의 대화 | 드라마 각본가 박해영을 만나다

시청자의 눈을 단번에 사로잡기 위해 자극적인 요소로 가득 찬 드라마가 주목받는 요즘이다. 그럼에도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우리 주변의 이야기를 그려내며 대중에 대한 위로를 멈추지 않는 작가가 있다. 박해영 작가는 1998년 SBS 시트콤 〈LA 아리랑〉의 보조작가로 작가 경력을 시작한 이래 2016년 〈또! 오해영〉, 2018년 〈나의 아저씨〉와 2022년 〈나의 해방일지〉로 연이어 성공을 거두며 수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지난 3일(일) 광화문 인근에서 차기작을 준비 중이라는 박 작가를 만났다.

 

주변인의 표정을 담다

박해영 작가는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다 우연한 계기로 드라마 작가가 됐다. 외환위기 이후 많은 회사가 부도나는 것을 지켜보며 ‘평생직장’을 물색했다는 박 작가는 처음부터 드라마 작가를 꿈꾸지는 않았다. 그는 “처음에는 다큐멘터리 작가가 되기 위한 수업을 들었다”라며 “담당 선생님이 내가 짧게 쓴 콩트를 보고 극작가로서 소질이 있다 평해주신 것을 계기로 드라마 작가의 길을 걷게 됐다”라고 회상했다. 선생님의 조언을 따라 드라마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박해영 작가는 올해로 어느덧 26년 차 중견 드라마 작가가 됐다.

그래서인지 박해영 작가는 우리 주변에서 엿볼 수 있는 일상적 인물을 그려낸다. 박 작가는 자신의 드라마가 “판타지나 미래 산업에 관해 쓰기보다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사람들, 즉 나와 비슷한 보통의 정서가 있는 사람들에 대해 쓴다”라고 밝혔다. 이는 일상적 인물의 갈증을 살피는 일이 곧 한 시대를 읽는 것과도 이어진다는 그의 생각에서 비롯됐다. 박 작가는 “대개의 사회 현상은 개별적인 인간 내면의 문제들이 쌓이고 쌓여 밖으로 표출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박해영 작가가 그리는 ‘일상적 인물’은 평범한 조건을 가졌지만 각기 단 하나뿐인 개성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는 “보통 1년 반 정도의 기간을 두고 작품을 구상한다”라며 “매력적인 인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머릿속에 이미지를 떠올려 에피소드, 느낌, 질감, 정서 등 인물과 관련된 총체적인 ‘덩어리’를 구성해야 한다”라고 인물을 작업하는 방식을 설명했다. 이렇게 탄생한 인물들은 대사만으로는 구현되지 않는 영상의 시각적 요소와 결합해 시청자들에게 한 명의 살아있는 인물로 다가간다. 〈나의 아저씨〉 속 소녀 가장이자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인물인 ‘이지안’의 삶은 항상 머리를 질끈 묶고 줄 이어폰을 낀 채로 지하철 차창 밖을 초점 없이 바라보는 장면으로 구체화된다. 또한 〈나의 해방일지〉에서 어느날 산포시에 등장해 껄렁한 나시에 짧게 부슬거리는 머리 차림으로 깡소주를 안주도 없이 묵묵히 마시는 ‘구씨’의 모습은 인간에 대한 환멸에 빠진 그의 상황을 고스란히 전한다. 

이렇듯 생생한 박해영 작가의 작품 속 인물들은 서사에 구애받지 않고 대사와 장면을 통해 본인의 내면을 마음껏 펼쳐 보인다. 이는 “메시지보다는 정서 전달이 먼저다”라는 그의 신념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작가가 메시지에 집착하는 순간 시청자를 상대로 작가의 의견을 주장하는 우를 범할 수 있기에, 작품을 집필할 때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정서 전달을 우선하는 집필 방식이 따로 존재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박 작가는 “어벤져스 시리즈처럼 서사에 맞게 인물을 직조해 나가기보다는 인물을 중심에 놓고 그 인물의 갈증과 정서를 채우는 방향으로 글을 쓴다”라고 답했다. 

 

갈증에서 출발한, 목마른 인물의 성장기

박해영 작가는 ‘결핍’을 서사의 중요한 추동력으로 내세운다. “내 안의 갈증이 곧 대중의 갈증”이라고 말한 그는 “〈또! 오해영〉을 쓸 때는 평생 갇혀있던 틀에서 벗어나 아낌없이 용감하게 사랑하고 싶었고, 〈나의 아저씨〉를 쓸 때는 요란하지 않지만 인간의 근원에 깊이 닿아있는 사람이 보고 싶었다”라고 전했다. 이런 작가의 갈증을 원동력 삼아 만들어진 인물은 저마다의 갈증을 가장 깊은 내면에 지니고 있다. 〈또! 오해영〉에서 평생 동명의 ‘이쁜 오해영’에게 비교 당해 위축된 ‘오해영’의 갈증은 결혼식 직전 파혼을 당하며 심화된다. 〈나의 아저씨〉에서 경제적으로 궁핍한 이지안은 사회와 회사로부터 외면받으며 인간과의 유대에 결핍을 느낀다. 박 작가는 〈나의 해방일지〉를 기점으로 우리 사회에 ‘채우기보다는 내려놓는 쪽’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목소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느낀다며 “내가 느끼고 있던 갈증을 대중들도 느끼고 있음을 다시금 알았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엄마 장례 끝나고 학굘 갔는데, 애들이 괜히 저랑 어떤 애랑 싸움을 붙였어요. 절대 날 이길 수 없는 놈하고(피식) 덩치만 컸지 힘을 쓸 줄 모르는 애였는데. 근데… 분위기가 이상했어요. 내가 져야 될 것 같은 분위기였어요. 그래서… 그냥 져줬어요. / (쓸쓸한 미소) 부모가 없다는 게, 이런 거구나….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팔 한 짝이 없어진 것 같더니, 엄마까지 돌아가시니까… 두 팔이 없어진 것 같더라고요.” 

- 〈나의 해방일지〉(2022)

그러나 박해영 작가의 작품은 결핍을 강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인물들의 ‘해갈’에 다다른다. 박 작가는 “많은 사람이 내가 별 볼 일 없는 결핍의 인물을 그렸다고 하지만, 그들에게는 반드시 강점이 있다”라고 강조했다. 그 예시로 박 작가는 “〈나의 해방일지〉 속 ‘염미정’은 자신을 추앙해달라고 먼저 요구하지만, 결국 자신이 알코올 중독자 구씨를 추앙해 그를 구원해 내는 인물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작품을 통해 이런 인물들이 현실을 ‘뚫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오해영은 ‘금해영’과 끊임없이 비교당하며 받은 상처와 결혼 하루 전 파혼으로 받은 상처를 딛고 아낌없이 사랑을 주는 인물로 나아간다. 이지안은 아저씨들의 따뜻한 도움에 힘입어 현실의 벽을 뚫어가며 삶의 의지를 회복한다. 

박해영 작가의 작품은 결핍 있는 인물을 해갈시키며 인물에 몰입한 시청자에게도 해소를 선사한다. 일례로 박 작가는 49년을 경기도에 살며 서울을 오간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나의 해방일지〉가 방영된 이후, 많은 경기도민이 공감하는 것을 보며 “모든 경기도민이 비슷한 이유로 지쳐 있었다”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박 작가의 작품을 통해 경기도민의 고충을 나누는 일종의 담론장이 형성되면서, 이를 통해 시청자들은 공감하고 발화함으로써 그들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고달프지만 따뜻한 유대

박해영 작가의 작품은 인물들의 개별적 해갈을 넘어, 결핍으로 고달픈 현실 세계에서도 유대를 잊지 않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박 작가는 다양한 형태의 유대를 통해, 드라마 속의 세계를 조금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 간다. 언제든 달려갈 수 있는 친구가 존재하는 〈또! 오해영〉의 오해영, 주말 아침에 축구를 함께하며 갖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나의 아저씨〉 속 조기축구회 아저씨들, 〈나의 해방일지〉에서 염씨 남매의 고민을 매일같이 들어주고 하염없이 위로하는 친구들 등 주변인들과의 유대는 박 작가의 인물들이 살아가는 하나의 기반이다. 

박해영 작가가 내세우는 유대는 추앙으로부터 발생하기도 한다. 〈나의 해방일지〉에 등장하는 추앙은 ‘높이 받들어 우러러봄’이라는 뜻으로 박 작가는 “추앙이란 이익에 대한 계산 없이 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추앙은 상대방의 수준을 재단하는 사랑과 구별되고, 상대방이 지닌 가장 밑바닥의 모습도 수용해 완전한 유대를 가능하게 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나의 해방일지〉 속 염미정은 숨 막히고 갇혀있는 느낌에서 ‘해방’되기로 결심한 이후 동네 구석의 술꾼 구씨에게 다가가 “사랑으론 안 돼. 추앙해요”라며 서로를 재지 않고 추앙하기를 요구한다. 이를 통해 쓸쓸함을 씹던 구씨와 행복하지 않던 염미정은 서로를 채워주고 응원하는 존재를 얻는다. 

“인간은요, 평생을 망가질까 봐 두려워하면서 살아요. 저는 그랬던 거 같애요. 처음엔 감독님이 망해서 정-말 좋았는데. (잠잠해지며) 망한 감독님이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더 좋았어요. 망해도 괜찮은 거였구나,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망가져도 행복할 수 있구나… 안심이 됐어요. (둘러보며) 이 동네도 망가진 거 같고… 사람들도 다 망가진 거 같은데…. 전혀 불행해 보이지가 않아요… 절대로. 그래서 좋아요…. 날 안심시켜 줘서….” 

-〈나의 아저씨〉(2018)

궁극적으로 이런 유대는 드라마 속 인물들을 서서히 해방시킨다. 〈나의 아저씨〉는 사회의 사각지대에 있는 이지안과 회사에서 내몰릴 위기에 처한 ‘박동훈’이 사내에서 서로 도우며 의지하는 존재로 거듭난 후, 몇 년이 지나 각자의 결핍을 해소하고 재회하며 끝을 맺는다. 한편, 〈나의 해방일지〉에서 염미정은 구씨와 공명하며 각자의 삶에서 결여된 것들을 채워가고 얽어매인 테두리에서 서서히 벗어나며 단단해진다. 

 

기자는 “시청자들이 눈물 나게 깔깔거리거나 조금이라도 풀려나는 느낌이 들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박해영 작가에게서 드라마 속 세계를 훌쩍 뛰어넘어 현실로 다가오는 위로를 느낄 수 있었다. 이는 아마도 “작가로서 자신의 비밀 공간에 마지막으로 품어야 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고 말하는 그의 따스한 시선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앞으로도 인간에 대한 사랑을 기반으로 해방을 향한 열쇠 같은 작품을 선물할 그의 행보를 기대한다.

 

사진: 손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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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아웃: 오소영 편집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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