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회 대학문학상 수상자 특별기고

제65회 대학문학상 문학·영화 평론 부문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고민규 씨(경영학과·19)의 영화 〈노 베어스〉(자파르 파나히, 2022) 평론을 싣습니다.

올해 1월 국내 개봉한 〈노 베어스〉(2022)는 79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영화다. 그리고 이 영화의 감독인 자파르 파나히는 수상자로 호명된 그 순간, 자국의 감옥에 투옥돼 있었다. 지난 10년간 파나히 감독이 어떤 환경에 놓인 상태로 영화를 만들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2010년부터 정치적 이유로 이란 정부에 의해 징역, 가택연금, 출국금지 등 많은 제재를 받아온 자파르 파나히는 이 신작에서 자신이 처한 이런 상황을 소재로 해 정치와 영화를 아우르는 깊은 질문을 던진다. 영화를 찍기 위해 분투하는 감독이 국경 마을에 머물며 여러 사건에 휩쓸리는 모습을 통해, 〈노 베어스〉는 현실과 영화의 관계에 대해 고심하는 한 감독의 서늘한 초상을 그려내는 데 성공한다.

〈노 베어스〉는 연출자의 손에서 벗어난 영화들로 시작한다. 영화의 첫 모습은 튀르키예의 골목거리인데, 유럽으로 망명하려는 박티아르와 자라가 그곳에 서 있다. 이내 카메라가 뒤로 빠지더니 노트북 화면을 건너 파나히의 방으로 위치하고, 파나히는 연출자로서 화면 너머로 말하지만 곧 신호가 끊겨버린다. 파나히에게 카메라를 받은 간바르도 마찬가지다. 파나히는 자신의 카메라를 간바르에게 맡기며 마을 전통 세족식이 있는 현장으로 가서 그 모습을 찍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간바르는 미숙한 카메라 조작 실력 때문에 파나히에게 도달해서는 안 될 뒷담화 영상을 녹화해 버리고 만다. 연출자는 피사체와 단절되고, 영화는 연출자의 의도를 벗어난다. 영화가 연출자의 욕망과 엇나간다면 그 영화는 누구의 영화인가? 감독은 무엇을 하(지 못하)는 사람인가? 이런 질문을 소환한 이후, 파나히는 국경선 근처로 향한다. 밤길을 차로 달려 어느 지점에 도달하자 저 너머로 튀르키예의 밝은 도시가 보인다. 그 국경 근처에서 그는 자신의 영화 조감독인 레자에게 자연스레 이런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국경선이 어디에 있지?” 레자가 대답한다. “감독님이 지금 밟고 계시잖아요.” 그러자 파나히는 본능적으로 경계에서 뒷걸음친다.

경계, 즉 외부와 내부를 횡단하고 구분 짓는 선. 〈노 베어스〉는 경계를 탐색하고 자신의 위치를 정립하려는 시도가 넘치는 장이다. 그곳은 연출자의 몸, 정치적 은유, 카메라의 역할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영화의 바깥과 상호작용하려는 의지로 채워져 있다. 그렇기에 영화는 감독-피사체와 시공간을 오가며 층위를 횡단하고, 그때마다 현실과 허구가 혼재돼 있다는 감각으로 관객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이 영화가 진정으로 응시하는 것은 다름 아닌 현실과 허구의 공존으로 인한 혼란이 의도치 않게 누군가를 침몰시키는 상황이다.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2011)부터 〈3개의 얼굴들〉(2018)까지 이전에도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중첩하며 영화라는 매체의 이중적인 모습을 드러낸 정치적 작업이 있었지만, 결국 〈노 베어스〉를 멈춰 세우는 것은 무력감과 의구심이다. 이뤄질 수 없는 커플인 솔두즈와 구잘은 국경을 넘으려고 하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망명의 실패를 직감한 자라도 죽은 채 바닷가에 떠밀려 온다. 경계 안에서 바깥으로 넘어가려는 시도는 항상 처참하게 실패한다. 영화가 현실을 향해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대답으로 돌아오는 것은 죽은 몸들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공허한 외침으로서의 영화. 이렇게 〈노 베어스〉는 바깥과 상호작용할 수는 있지만 바깥에 결코 닿지 못한다는 의미심장한 명제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노 베어스〉의 바깥은 어디일까? 영화의 경계가 항상 영화 그 자체라면, 영화의 바깥은 영화가 포착하지 못한 모든 곳이다. 솔두즈와 구잘의 사진은 파니히 스스로가 찍지 않았다고 강조하며 계속 그 존재를 부인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 사진을 끊임없이 찾는다. 파나히가 정말로 그 사진을 찍었는지에 대한 사실관계는 영화가 보여주지도 않고 크게 신경 쓰지도 않기 때문에 관객들도 알 수 없다. 영화가 문제 삼는 지점은 인식할 수 없는 바깥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반응이다. 그 반응이란 단순하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발명하는 일이 더 간편하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파나히가 카메라에게 부여하는 의미를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는데, 카메라는 저항의 무기이며 증언하고 계몽시킨다는 점에서 그 힘을 지닌다. 그런데 이런 면모 때문에 파나히가 든 카메라는 역설적이게도 실패한다. 존재하지 않는 피사체에 대해서 카메라가 할 수 있는 일은 침묵뿐이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할 일을 잃었을 때,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는 현실의 지위를 점유하고 영화의 바깥에서 영화를 은밀히 바라본다. 그리고 오직 눈앞에 현전하는 피사체만을 포착할 수 있는 카메라는 한없이 침묵할 수밖에 없고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카메라는 더 이상 증언하는 일도 진실의 빛을 밝혀내는 일도 할 수 없다.

수난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또 다른 수난의 대상은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몸이다. 〈노 베어스〉가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오가는 듯한 효과를 내는 가장 큰 까닭은 응당 카메라 앞에 현전하는 파나히 감독의 몸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파나히는 자기자신을 연기함으로써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극영화의 구조적 안정감을 교란한다. (〈노 베어스〉의 감독인) 파나히가 (영화 안의) 파나히를 연기하기로 결정한 것은 당연히 정치적인 결단으로, 영화 안에서 자기 몸을 통해 점유하고, 말하고, 움직이고, 그리고 그 무엇보다 존재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여기에서 영화의 어느 순간 파나히에게 던져진 중요한 말을 떠올려 보자. 자라가 화면 너머의 파나히에게 카메라를 응시하며 항변하는 장면. 자라는 자신들의 삶을 다룬 영화를 해피 엔딩으로 끝맺음 하려는 파나히에게 이렇게 외친다. “지금 뭐 하는 거죠? 진짜인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이어 그녀는 박티아르의 여권이 사실 위조된 것임을 밝히며, 자신들의 삶이 이제는 “거짓 인생”이 됐다고 강하게 말한다.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가짜인 이야기로 우회하는, 한 마디로 현실을 증언하는 데 실패한 상황. 그리고 이것은 파나히 감독 자신이 처한 곤란이기도 하다.

파나히의 몸이 영화 안으로 들여보내지면 다루기 곤란한 질문이 튀어나온다. (〈노 베어스〉의 감독인) 파나히는 왜 자신이 처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영화 안으로 들어와서 연기해야만 하는가? 카메라 앞의 나‒자파르 파나히‒조차도 스스로가 되기를 연기해야 한다면, 나는 왜 카메라 앞에 서야 하는가? 파나히는 이중적이라고 말할 만한 기능을 내비치며 ‘까다로운’ 배우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노 베어스〉의 세계는 모든 일이 단순하게 들어맞는 평평한 곳이 아니라, 사건들이 서로 얽히면서 이어지고 확장되는 굴곡진 감각을 지닌 이질적인 장소다. 그래서 그가 연기하며 〈노 베어스〉라는 허구적 세계에 자연스레 녹아들어도, 그의 몸은 항상 단지 존재함 그 자체로 무언의 의문을 제기한다. 카메라가 정직하다면 왜 나는 항상 은유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가? 나를 은유하는 나 자신. 보일 수 없는 것을 대체하는 보이는 것.

이처럼 〈노 베어스〉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 속칭 뒷세계의 존재를 개시한다. 그래서 은유처럼 비밀을 품은 사연과 예상치 못한 사건이 파나히의 곁에서 갑작스레 나타나고 다시 사라진다. 갑자기 밤 도로에서 튀어나오는 구잘, 방으로 불쑥 들어온 솔두즈 그리고 파나히에 대해 험담이 녹화된 간바르의 푸티지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무언가가 나타나고 사라질 때마다 영화는 예민하게 흔들린다. 파나히는 어딘가에 속하지도 못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도 실패한 채로 마치 무균실에 갇힌 것처럼 마을 주민과 자신의 영화 촬영 현장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자리에 놓인다. 모니터 너머로 바라본 영화 촬영 현장은 자기 생각대로 흘러가지 못하고, 창문 너머에서 소란스레 말다툼을 하던 주민들도 파나히와 마주하면 격식을 차리고 차 한잔을 받아들인다. 무엇인가 중요한 사건이 영화 바깥에 놓여있는데 그 사건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할 때마다 현실은 역설적으로 더 멀리 달아난다. 마치 스스로 진실의 담지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듯, 영화는 관객을 무지에 대한 물음으로 안내한다. 

영화 안의 파나히는 자가당착에 묶인 몸이다. 영화의 중요한 장면들‒사진의 피사체, 죽음의 순간‒은 영화 바깥으로 밀려나고, 이제 영화에는 그것에 대한 소문과 반응만이 남는다. 그러면서 〈노 베어스〉는 영화가 일반적으로 지니는 속성인 허구성과 가시성을 의심하고, 그 의심을 토대로 활용해 관객에게 눈앞에 보이는 것 대신 보이지 않는 것과 감추어진 것을 생각하게끔 만든다. 그러므로 〈노 베어스〉는 바깥을 가리키고 지시하는 영화다. 동시에 현실-영화의 상상적인 관계를 의심하는 영화기도 하다. 영화 안에서 파나히의 곤란은 영화 밖에서 자신이 처한 정치적 곤란을 향해가며, 영화는 이 틈 자체를 통해 어떻게 부당한 현실에 대항할 수 있을지 가능성을 모색한다. 〈노 베어스〉에서의 저항은 단지 현실을 폭로하고 사실들을 증언하는 시선을 통해 성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들의 주체적인 구성 능력을 믿고 시선을 영화 바깥으로 돌리는 것에서 저항의 가능성은 생겨난다. 이 영화의 제목처럼, 곰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곰’이란 우리가 현실에 있다고 혹은 진정한 현실이라고 믿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다. 이 믿음에 “No”라고 의심을 제기하는 것. 영화 안에 놓인 거짓 인생들과 실패한 시도들의 허약함을 바라보며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자리를 마련하는 것. 이를 위해서 영화는 자신을 소모하고 멈추고 생각한다. 〈노 베어스〉라는 ‘영화적 신화’는 스스로 죽음으로써 바깥의 공간에서 되살아나기를 기원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파나히는 자동차를 타고 마을을 빠져나가려고 하다가 문득 멈춰 선다. 그리고 자동차의 시동을 꺼버린다. 〈택시〉(2015)와 〈3개의 얼굴들〉도 자동차가 멈춤으로써 영화는 그 소임을 다한다. 그 2개의 결말 모두 희망과 연약함을 오가는 양면적인 모습을 보였다. 카메라 곁에는 장미 한 송이가 놓여있지만 이내 차에 강도가 들어 카메라는 꺼져버리고(〈택시〉), 막힌 길 너머로 나란히 걸어가는 두 여자의 모습이 보이는 소망의 이미지는 금이 간 채로 균열을 보인다(〈3개의 얼굴들〉). 이처럼 희망 앞에는 항상 침묵과 반성의 자리가 있었다. 자신을 결코 투명하게 두지 않은 채, 피사체와 스크린 사이에 있는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보여줬던 이전 장면들처럼, 〈노 베어스〉도 파나히가 차를 멈추자마자 영화는 적극적으로 어둠을 향해 사라진다. 

자동차는 장소와 장소를 횡단하고 잇는다. 그리고 자동차는 창밖에 펼쳐진 흘러가는 세계의 이미지를 흡수하는 동시에, 바깥과 내부를 분리한다. 그래서 자동차가 멈추는 순간, 어딘가로 향하려던 움직임은 끊어지고 바깥의 풍경도 내부의 리듬에 맞춰지며 함께 멈춰 선다. 운동하던 자동차와 영화는 함께 그 자리에 멈춰선 채, 그 중단된 자리에서 이런 물음을 내놓는다. (영화라는) 자동차는 왜 멈춰 설 수밖에 없는가? 자동차 뒤에는 죽은 이들이 놓여있고 파나히는 밀실에 안전하게 갇혀있다. 한마디로 영화는 방관자다. 그러므로 멈춘다는 것에 대해 묻는 것은 뒤에 남겨진 것들에 대한 결단에 관해 질문하는 것과 같다. 뒤에 있는 것을 무시한 채 단순히 앞으로 질주할 수 있을까? 그래서 파나히는 국경을 넘지 못한다. 그리고 영화는 스스로 사라지기를 각오한다. 자동차가 멈춰선 자리는 영화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 자리고, 영화가 있었던 자리는 이제 그 누구의 자리도 아니다. 〈노 베어스〉가 그렇게 사라지면, 파나히가 영화를 멈춰 세우며 던진 질문은 고스란히 관객 앞에 놓인다. 영화가 끝나면, 이제 영화의 바깥-비어있는 스크린-에 대해 생각할 시간인 것이다.

출처: M&M 인터내셔널
출처: M&M 인터내셔널

 

고민규(경영학과ㆍ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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