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국어국문학과·18)
김명환(국어국문학과·18)

나는 가난하다. 스무 살 때는 과외 알바를 다섯 개씩 뛰었고, 코로나19 시기에는 녹두거리의 3평 남짓한 단칸방에서 살았다. 그 무렵 일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나도 모르게 가라앉고 있는 건 아닐까. 당장 코앞에 닥친 일들만 겨우겨우 치워가면서 어쨌든 오늘 하루도 잘 살았다고 자위하는 건 아닐까. 남들이 광장으로 달려 나갈 준비를 하는 동안 마당 앞의 눈만 쓸면서 나이를 먹는 건 아닐까. 멀리 봐야 한다는 걸 아는데 조급함을 떨치기가 어렵다.”

나는 가난하지 않다. 전역 후 역세권 1.5룸에 입주했다. 내 형편에 사치인 집이었지만, 그 ‘사치’조차 아무나 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은 취준생이라는 이유로 일을 하지 않는다. 모아 둔 자금을 쓰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께 용돈을 올려 받은 것이다. 가끔 배달음식을 시켜 먹고, 충동적으로 새 옷을 산다. 아, 우리 집 소득분위는 4분위다. 이제 1~3분위 여러분들은 돌을 던져도 된다. 여러분은 ‘자격’을 얻었다.

이른바 ‘도둑맞은 가난’ 담론이 유행하면서부터였을까. 어느덧 가난은 그 자격을 증명하기 위해 분투해야 하는 무언가가 됐다. 자신이 백수임을 소명하러 무슨무슨 서류를 떼러 가야 한다던 친구는 ‘귀찮고 비참하다’고 표현했다. 자기PR도 아니고, 나의 가난을 주장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는 과정을 이만큼 잘 정리한 말이 있을까. 그런데도 자격 없는 사람들이 이따금 빈자를 자처하는 이유는 무얼까. 어쩌면 순전히 ‘가난’과 이른바 ‘가난감’(家難感)의 혼동에서 기인한 현상일까.

과거에도 가난과의 거리를 좁히려는 ‘가진 자’들의 노력은 있었다. 서민적인 모습으로 친근감을 과시한 정치인들이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기만자’들은 정말로 ‘나도 약자’라고 믿는 모양새다. 조문영의 『빈곤 과정』은 모두가 “나도 약자다”를 외치는 작금의 현상이, 다양한 정체성 담론의 확산에 의해 기득권으로 지시된 자들의 안전지대를 확보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한다. 탁월한 진단이다. 나는 어쩌면 이미 가진 것을 사유하고 반성하기 싫어서, ‘철없는 서울대생’에게 가해질지 모를 철퇴를 피하고 싶어서 나의 가난을 주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어쩌면 그저 내 삶에 적절한 술어를 찾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불안, 우울, 무력감, 때때로 그로부터 오는 게으름과 괴로움은 가난보다는 ‘취약성’이라는 단어로 더 잘 설명될 수도 있다. 수많은 청년 프레카리아트가 그렇듯이 나 또한 고용의 불안정성과 미래에 대한 어두운 전망에 고통 받는다. 취약성은 1분위와 10분위로 계량화하기 어려운 지표다. 모든 청년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지는 않을지언정, 가난보다는 분명 공통적인 경험이다. 그렇다면 올바른 대안적 담론으로 말하지 못한 것이 내 ‘기만’의 근본적인 원인일까.

어쩌면 ‘나’는 외로운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아픔을 토로하고 공감 받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내 삶의 서사를 쓰고, 그 과정에서 부적당한 술어를 가져오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아는 술어는 그것뿐이므로. 내 마음을 잘 표현할 술어를 적재적소에 찾아 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담론은 그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만들어져 왔다. 이 지점에서 나는 ‘기만’이 사실 ‘소외’의 둔갑이었던 사례들을 상상한다. “너는 ‘가난’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고 있어”라는 지적이 참이지만 ‘진실’은 아닌 사례들을.

우리는 정확하게 말하고 정확하게 듣는 데 익숙하다. 그렇게 하는 법을 배워 왔으므로, 상대도 응당 그럴 것이라고 암암리에 가정한다. 나는 정확하게 말하고 서툴게 듣는 법을 배우고 싶다. 그로써 상대가 표현하고자 한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서고 싶다. 그리고 그로써, 우리가 연결될 가능성의 씨앗이 움트리라고 생각한다. 토론이 사실은 토론이 아닌 순간들, 집단적 독백의 연속체를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은 거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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