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다현(정치외교학부 외교학전공 석사수료)
정다현(정치외교학부 외교학전공 석사수료)

최근 ‘힘을 통한 평화’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도 신년사에서 “상대의 선의에 의존하는 굴종적 평화가 아닌, 힘에 의한 진정한 항구적인 평화”에 대해 언급했다. ‘힘을 통한 평화’는 직관적이고 강력한 구호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최선의 대안인가? 그 정당성이 설파되는 정도에 비해 양면성에 대한 논의는 소홀하다. 

‘힘을 통한 평화’란 강력한 군사력으로 적대국을 억제하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론적으로 ‘압도적 힘’은 적과의 갈등을 억지하거나 행동을 변화시키는 데 있어서 양날의 검이다. 적은 강력한 힘 앞에서 굴복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강력한 힘은 적을 벼랑끝으로 몰아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하고, 상대와 타협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게 해 외교적 수단을 통한 해결에서 멀어지게 하기도 한다. ‘힘을 통한 평화’를 주창하는 이들은 이런 양면성을 어쩔 수 없는 부작용쯤으로 생각하나 이는 단순한 부작용이 아니다. 무력증강을 통한 처방책에만 의존하는 것은 현상을 악화시킬 수 있고, 나아가 미래의 외교정책 선택지마저 제한하게 될 것이다. 

힘을 통한 평화는 군비경쟁을 심화해 전쟁 위험성을 높인다. 군사력의 증강은 반대편 군사력 증강을 불러오고, 안보딜레마를 심화시킨다. 여전히 군사적 충돌을 겪고 있는 인도-파키스탄 사례가 그 예시다. 평화를 위한 핵개발 과정이 모순적으로 안보 상황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힘을 통한 평화’의 부정적 영향에 대해 두 가지 반응이 있다. 하나는 ‘군비경쟁을 위해서라도 더욱 압도적 힘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무리 그래봤자 적이 진짜로 전쟁을 시작할 수 있을리 없다’는 반응이다. 

우선 군비경쟁에서 설령 압도적 우위를 차지해 전쟁을 불사한다고 해도 그것이 결과적으로 ‘평화’를 가져올지는 미지수다. 압도적 힘을 가졌던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결국 패했고, 아프가니스탄이 ‘제국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것도 소련이나 미국이 압도적 힘을 구축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적이 설마하니 전쟁을 불사하겠냐는 믿음도 위험하다. 군사적 긴장이 통제할 수 없는 수준까지 고조된다면 어떤 파국이 찾아올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또한 압도적 힘의 증강이 필요하더라도 과도한 의존은 외교적으로 우리의 발을 묶어놓는 처사가 될 뿐이다. 정책적 유연성 측면에서 리스크를 안고 가는 행위인 것이다. 이때 유연성이란 복잡하고 불확실한 국제정치 환경 속 여러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과 수단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한반도 정세는 주변 강대국 영향을 많이 받기에 외교적 유연성을 확보해야만 한다. 그런데 압도적인 군사적 힘을 쌓는 데만 집중하고 외교적 통로 관리를 소홀히 한다면 기회의 창이 왔을 때 적절하게 대응하기 어렵다. 실제로 과거 변화한 정세 속에서 대화채널 복구에 시간이 오래 걸려 북핵 협상에서 북미 대화의 속도를 남북관계가 따라가지 못했던 경우가 있었다.

레이건 행정부의 일례를 보자. ‘힘을 통한 평화’ 기조를 내세웠으나 동시에 소련과의 외교적 유연성을 놓치지 않았다. “평화적 의도에 대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소련을 설득하며 (중략) 전략탄도미사일을 50%까지 축소하고 모든 지상용 중거리 핵전력을 제거하겠다고 제안하는 쪽은 모두 서구라는 점을 상기시킬 것”이라 말하면서 중거리 핵미사일 제거 조약을 성사시키는 등 평화적 행보도 함께 보여줬다. 우리 역시 힘을 유지하되 상황이 따를 때 유연하게 외교정책을 선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복잡한 한반도 정세 속에서 ‘힘을 통한 평화’라는 구호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모두가 평화를 절실히 원하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즉, 방점은 평화에 찍혀있다. 그러나 최근 양상을 보면 평화보다 힘 그 자체의 축적이 더 강조되는 모습이다. 주객전도가 아닐 수 없다. 강력하고 직관적인 구호 이면의 위험성을 인식해야 한다. 힘을 구축하되 평화를 위한 움직임도 적극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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