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16번 버스를 타고 신림역으로 가는 길가에는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초등학교 담벽이나 동네 어귀의 전봇대에서도 낯설지 않게 볼 수 있는 글귀다.

언제부턴가 ‘농촌총각 장가보내기’라는 말과 함께 동남아시아 여성들이 한국 농촌으로 시집온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게 됐다. 얼마 전에는 「결혼 원정기」라는 영화도 개봉했다. 서울대 주변 난곡지역에도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으로 온, 동사무소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당수의 외국인 여성들이 있다. 이제는 농촌 총각뿐만 아니라 도시의 많은 남성들도 저소득 국가의 외국인 여성들과 국제결혼을 하고 있다.  

대중매체들은 미흡하나마 국제결혼의부작용을 지적하고 있다. 그녀들은 매 맞는 아내로, 한국사회의 부적응자로, 혹은 최근 불거진 문제인 ‘코시안(코리안과 아시안의 합성어)’의 어머니로 비춰지고, 우리는 이를 ‘신종 사회문제’라고 부른다.

그러나 국제결혼의 정당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모습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속전속결로 치러지는 맞선과 이 과정에서 한국남성에게 폭리를 취하는 결혼 중개업자의 모습만이 문제로 드러날 뿐, 그 거래에서 철저히 수단화되는 인간, 곧 여성의 문제에는 무관심하다.

국가는 저출산 문제에 허덕이고 남성은 결혼할 여성이 필요한 상황에서 국제결혼은 가뭄의 단비로 비칠 수 있다. 외국인 여성들은 한국에서 한국인을 출산할 것이고, 맞을지언정 한국인을 때리지는 않을 것이며, 외국인 남성 노동자처럼 한국 남성의 일자리를 빼앗지도 않고 오로지 가정에서 얌전히 살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덕택에 불안한 사회, 남성, 국가는 기존의 가치와 자리를 지켜나갈 수 있다. 그 수단인 저소득 국가의 여성은 사회유지를 위해 이용되는 소비재에 불과하다.

‘베트남 처녀’를 수단으로 삼아 가부장적 질서를 지키려던 기존 사회는 새로운 혼란을 맞이하게 됐다. 국어책을 읽지 못하는 엄마와 초등학생 자녀, 이들은 소비재이기에 국어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누군가의 계산에는 없었던 현상이었을 것이다.

결혼할 의지가 있는 저소득층 남성을 “이러한 국제결혼은 여성을 인간이 아닌 소비재로 전락시키는 비인간적 행위며, 큰 사회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는 논리로 설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를 억압해서 얻은 이익은 반드시 또 다른 갈등과 억압을 낳는다.  

최도희 간호학과·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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