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향(인문대 교수·서양사학과)

기회의 평등보다 결과의 평등 중시하는 우리 사회
개인의 능력이 최대한 발휘돼야 사회도 발전할 것

몇 년 전부터 종강시간에 학생들에게 진지하게 부탁하는 말이 생겼다. 이 사회의 진정한 엘리트가 되어달라고. 누군가가 적나라하게 표현한 대로, ‘급이 안 되는’ 사람들이 설치는 세상을 살다보니 제대로 된 엘리트가 제대로 활동하고 인정받는 세상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 것이다. 엘리트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폄훼에는 실상 엘리트 자신의 책임도 막중하다. 역사상 우리 엘리트들은 누리기만 하고 베풀 줄은 몰랐던 것 같다. 한 예로, 19세기 말 조선을 관찰한 외국인들은 양반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물론 개인적으로 훌륭한 생을 산 분들도 많았지만 전체적으로 조선시대 엘리트는 실패한 계층이었다. 망국(亡國)이 바로 그 증거다.

현 정권의 중점 과제 가운데 하나는 기득권자들을 흔드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바람직한 일이다. 노력하지 않은 채 누리기만 하는 사람들은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지난 3년간 능력 있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조차 단지 잘났고 이제껏 잘 나갔다는 이유만으로 불이익을 받는 역차별을 당해 왔다. 우리 사회가 대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평등 개념이다. 평등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은 능력의 평등을 당연시하고 결과의 평등을 요구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할 때 그 말은 인간이 평등한 ‘가치’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말이지, 평등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물론 능력이 떨어지는 것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잘못 역시 불식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이 각자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사회전체의 복리가 증진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각기 다른 능력과 잠재력을 똑같이 만드는 것이 평등이라고 오해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는 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나라가 구렁텅이에 빠졌다가 다시 살아난 예로 1980년대 이후의 영국을 들 수 있다. 마거릿 대처 수상은 개인적이고 경쟁적인 것은 무조건 나쁘고 사회적이고 획일적인 것은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1945년 이후의 사회문화 현상의 잘못을 지적하고, 개인의 창발력과 수월성을 사회발전의 중요한 동인으로 부각시켜 나라를 영국병(病)으로부터 구해냈다. 뒤이은 노동당 정부 역시 같은 목표를 지향하여,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의 평등을 확대하고자 했다. 즉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효율성을 높이고, 사회적 약자에게 돌아가는 혜택도 증대시키려는 것이다. 이런 사례를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 사회는 여전히 획일성이 최고의 미덕이라는 착각에 빠져있다. 

나는 요즘 새삼스레 내가 서울대 교수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고 그에 걸 맞은 노력을 하고 있는지 자성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급이 안 되는’ 사람들이 기여한 면도 있는 것 같다. 마침 우리학교 자연대 교수 승급심사에도 비슷한 질문이 등장했다고 한다. 우리 학생들에게도 진정한 엘리트가 될 자질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자문해 줄 것을 부탁하고 싶다. 엘리트가 엘리트의 책임을 다하는 사회가 발전하는 사회라는 자명한 진리가 훼손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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