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김구 탄생 130주년-『백범일지』로 다시 본 김구 선생

지난 22일(금)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김구 선생 탄생 130주년을 기념해 ‘백범 김구의 생애와 사상과 민족운동’을 주제로 국제학술회의(학술회의)가 열렸다. 또 같은 곳에서 19일(화)부터 「백범 김구 선생의 길, 그리고 희망」 특별전이 열려 백범의 유물 30여 점과 백범 관련 도서 130여 점이 28일까지 전시된다.

『백범일지』는 백범이 두 아들에게 유서로 남겨주기 위해 쓴 자서전이다. 백범이 1929년 53세 때 상(上)편을, 1942년 67세 때 하(下)편을 집필했고, 이를 백범의 둘째 아들 김신씨가 1947년 12월 책으로 냈다. 지금까지 『백범일지』의 정본은 60여 종, 『백범일지』를 풀이한 평전은 약 50여 종이 간행됐으며 현재 영어판, 일어판, 중국어판 등으로도 출판돼 국내외에서 꾸준히 읽히고 있다.

『백범일지』를 통해 백범이 동학․유교․불교․기독교 등 다양한 사상과 종교를 경험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열여덟 살 되던 해, 빈부귀천에 따라 차별대우를 하지 않는 동학에 빠졌다. 이후 그는 스승 고석로를 만나 ‘의리’와 ‘결단력’의 귀중함을 배우고 ‘위정척사사상’을 전수받았다. 1896년 백범은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킨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로 추측되는 한 일본인을 죽여 교도소에 갇혔다. 그는 옥중에서 서양서적을 읽고 “의리는 유학자들에게 배우고, 문화와 제도 일체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해 적용하는 것이 국가의 복리”라고 깨달았다. 1898년 3월 감옥을 탈출한 백범은 충청남도 마곡사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불교의 가르침을 받았다. 또 1902년경에는 신교육운동, 국권회복운동을 하면서 기독교에 입문했다.

학술회의에서 권오영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연구실)는 “백범은 청년기부터 다양한 사상․종교적 체험을 거치면서 특히 ‘마음’을 중시해 진정한 독립의 길을 우리 민족만의 철학 또는 마음을 건설하는 데서 찾고자 했다”고 말했다.

또 백범은 교육이야말로 나라를 구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백범일지』에서 그는 “우리는 세계 각국의 교육제도를 본받아 학교를 세우고 이 나라 자녀들을 교육해야 한다”고 교육사업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1903년 황해도 장련읍에서 처음으로 학교를 열었고 이후 장련공립학교, 양산학교, 서명의숙 등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교육구국활동에 전력했다. 학술회의에서 순커즈(孫科志) 교수(중국 상하이푸단대 역사학과)는 “백범의 열정적인 교육활동은 그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과 애국계몽운동에 힘썼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백범일지』에는 백범이 우리나라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쳐 헌신하는 모습이 생생히 그려져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 국무령 등을 역임한 백범은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일본 천황, 조선총독 암살 등을 시도했다. 신용하 명예교수(사회학과)는 학술회의에서 “한인애국단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설한 전략․전술적인 ‘특공대’”라고 설명했다. 그는 백범을 “외교를 중시한 종합적인 전략가이자 평화주의자”라고 강조했다. 광복 이후 백범은 “오로지 통일 정부만이 살 길”이라며 다른 어떤 이념보다도 한반도 평화를 최우선시했다는 것이다.

최병택 강사(국사학과)는 “백범은 ‘열린 민족주의’를 지향했다”며 “『백범일지』에 나타난 민족애뿐 아니라 동시에 세상에 대해 개방적이고 공평한 그의 의지를 배워야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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