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의 대화] 소설가 이기호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Bernard Show)의 묘비에 적힌 글귀다. 죽음마저도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그 유머감각에 반해 이기호씨는 그의 자전소설 제목으로 이 글귀를 선택했다. 슬픔에 웃음을 덧씌워 내는 그의 소설에 적격인 제목이다.

지난 1999년 『현대문학』 신인추천 공모에서 성매매 종사자의 삶을 랩 형식을 차용해 그려낸 단편 「버니」가 당선돼 등단한 이기호씨는 2004년 첫 소설집 『최순덕 성령 충만기』를 펴냈고 지난달 두 번째 소설집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를 선보였다. 경쾌한 화법으로 슬픈 얼굴을 그려내는 그의 소설은 평단의 호평과 대중의 관심을 동시에 받아 왔다.

‘그 어미와 함께 교회에서 밥을 먹고 교회에서 기도하고 찬양드리고 늦은 밤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가는지라.’(「최순덕 성령 충만기」), ‘당신의 온 신경을 터널 끝으로 모으면 됩니다…… 자, 이제 빛이 보이면 오른손 두 번째 손가락을 가볍게 들어보십시오. 예, 좋습니다.’(「나쁜 소설-누군가 누군가에게 소리 내어 읽어주는 이야기」) 그의 소설은 랩, 성경의 화법, 최면 기법, 요리 방송 멘트를 넘나든다. 그는 “정통 소설 형식 대신 주인공의 목소리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기 때문”이라며 “애초 소설은 이야기였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화법에 담기는 유쾌한 이야기에는 역설적이게도 늘 무력한 주인공이 등장한다. 몇 년째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고시생(「나쁜 소설」), 자해공갈을 시도하는 젊은이들(「당신이 잠든 밤에」), 나라가 망한 줄도 모르고 소설을 쓰는 소설가(「수인(囚人)」)는 하나같이 밑바닥 인생을 사는 청춘들이다. 사실 이들은 작가 자신이거나 그의 주변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고등학교 때 그는 ‘양아치’건 점잖은 친구건 가리지 않는 넓은 교우관계를 유지했고 지금도 여전히 ‘인간 공부’ 중이다. ‘몸으로 부딪혀 사는 인생’에 대한 경외심은 그의 소설을 겸손하게 만든다.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는 이러한 그의 좌충우돌 경험담을 담고 있다. 유난히 깡패에게 ‘집단린치’를 자주 당하는 주인공처럼 ‘아무 이유없이’ 깡패한테 얻어맞은 경험이 많았다는 그도 소설에서처럼 2층 당구장에서 뛰어내린 적이 있다(피하려 했던 대상은 ‘깡패’가 아니라 ‘선생님’이었지만). 그의 불운은 요즘도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대학시절 여자친구와 건물 5층에서 뽀뽀하기 직전 4층에 불이 나 사다리차를 탔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찜질방에 갔던 날에는 찜질방에 불이 났다. 서울대 앞에서 시위에 참가했다가 도림천에 빠진 기억도 있다. “이런 경험들 때문에 제가 소설을 쓰는 거겠죠.” 지독히 운 나쁜 그의 인생도 그에게는 ‘소설가가 되기 위한 계시’쯤으로 여겨진다. 우연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그의 소설은 현대소설의 덕목으로 꼽히는 ‘필연성’에 구애받지 않아 더욱 자유롭고 흥미진진하다.

소설을 쓰려고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던 그는 좀처럼 마음을 못 잡다가 군대에서 비로소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한가했던(?) 군생활 덕에 책도 많이 읽고 좋아하는 소설을 베껴 쓰며 문장 연습도 많이 했다.

학부 졸업 후 명지대 대학원에서 박범신 교수(문예창작학과)를 만나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박 교수의 용인 작업실에 갇힌 1년은 세상과 단절돼 소설 쓰는 일밖에 할 일이 없었던 시간이었다고 회고한다.

이기호씨는 소설가가 쉽지 않은 직업이라고 말한다. 그는 “연봉이 600만원 정도라 세금을 돌려받은 적도 있고 무소득증명서를 써본 적도 있다”며 “3주 전 결혼한 아내가 소설을 쓰고 싶어해서 큰일”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하지만 정작 그는 경제적 어려움에 초탈한 모습이다. “예전부터 돈에 맞춰 사는 생활에는 익숙했어요. 욕심만 없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니까요.” 그는 오히려 “몸이 편하면 소설을 쓸 수 없다”며 창작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팽팽한 긴장감이 필요하다고 고백한다. 수많은 상상과 고뇌 끝에 쓰러지기 직전 첫 문장을 쓰는 것이 소설이라는 것이다.

그의 대학 학점은 ‘친구 셋을 모아야 3점이 겨우 될 정도’라지만 ‘원없이 연애를 한 덕’에 후회는 없다고 한다. 그는 “연애야말로 대학시절에 꼭 해봐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사랑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인간의 심층적인 면을 헤아릴 수 있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인지의 혁명’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군대 간 애인에게 결별의 편지를 보내라”며 ‘문학보다 고차원적인 예술’을 경험할 것을 조언했다.

그가 자신의 소설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국기게양대 로망스-당신이 잠든 밤에 2」이다. 소설의 주인공들이 오히려 그를 위로하는 듯한 느낌 때문이라고 한다. “소설을 통해 독자가 위로받고, 나도 그것을 통해 위안을 얻었으면 한다”는 그는 “교도소의 전과 7범도 쉽게 읽고 웃을 수 있는 ‘먹물냄새 나지 않는 소설’을 쓰겠다”며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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