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학기 전부터 수강 시간표를 짜기 전에 필히 확인해야 할 사항이 생겼다. 바로 수강편람의 ‘수업진행언어’. 마침 들으려고 했던 시간대의 강의가 하필이면 영어강의다. 내가 영어강의를 수강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시간대는 좀 불편하지만 다른 강좌를 신청하는 수밖에.

최근 한두 학기 사이 영어강의가 부쩍 늘었다. 서울대는 지난 2005년 1학기에 외국인 유학생을 위한 영어 교양 교과목 24개를 처음 개설했으며 2006학년 1학기에는 전체 교양강좌의 10%를 영어강의로 지정했다. 공대는 2007년 1학기부터 외국인 학생이 1명이라도 수강하는 모든 과목을 영어로 진행할 것이라 발표했다.

영어강의 증설 추세는 서울대보다 다른 대학에서 훨씬 뚜렷하다. 카이스트는 2007년부터 모든 신입생 대상 강의를 영어로 개설하기로 확정했다. ‘신입생 대상 강의는 모두 영어로 진행 한다’는 원칙은 심지어 국어나 국사 과목에도 예외를 두지 않을 방침이다. 고려대는 현재 개설된 영어강의가 전체강의의 35%에 달하며 연세대도 영어강의 비율이 20%에 육박한다.
이와 같은 다른 대학의 ‘눈에 띄는’ 행보와 비교했을 때 영어강의 개설비율이 4~5%인 서울대는 마치 국제화 경쟁에서 뒤처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가 해외의 유수대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 서울대의 ‘국제화’ 수준이 높아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우수한 외국인 유학생을 유치하고 이들에게 적합한 강의를 제공하기 위해서라도 일정 수 이상의 영어강의는 필요하다. 서울대 학생들의 국제경쟁력 향상을 위해 학생들에게 영어 수업 경험을 제공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모두 맞는 말이다. 하지만 단순히 영어강의 개설률 몇%, 외국인 전임교원 몇%, 외국인 학생 수 몇%…우리가 흔히 국제화의 지표로 떠올리는 이런 수치들이 정말 국제경쟁력을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눈에 보이는 ‘숫자’는 늘리기 쉽다. 정말 중요한 것은 실질적인 국제경쟁력 향상이다. 이러한 ‘진짜실력’이 영어강의 증설로 인해 오히려 훼손될 수 있다. 최근 경영대를 비롯한 몇몇 단과대학은 영어 전공강의를 점차 늘려나가고 있다. 그러나 영어강의가 수요에 비해 많이 개설될 경우 영어 쫓아가기에 급급해져 전공지식의 심도있는 이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또 대형 전공강의의 경우 한국어 강의는 정원이 넘쳐 수강을 원하는 학생들이 신청도 하지 못하는 반면 같은 강좌의 영어강의는 신청자가 정원에 한참 미달하는 등 학생들의 수업선택 폭이 제한되는 경우도 발생한다.

국제경쟁력의 중요한 요건인 학생들의 어학능력 향상에 있어서도 무턱대고 영어강의를 늘리는 것 보다는 정교한 영어/외국어 교육 커리큘럼을 만들고 지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현재는 대학영어와 고급영어 사이의 수준에 알맞은 영어강의가 없다. 텝스 700점대 정도의 학생들은 규정상 대학영어는 들을 수 없고, 그렇다고 고급영어를 듣자니 난이도에 대한 부담감에 선뜻 신청하기 힘들다. 제2외국어 수업도 한 강좌 당 정원이 30명에 달해 한 명의 교수가 발음 등을 꼼꼼하게 가르치기에는 역부족이다.

‘영어강의 수 몇% 달성’을 대학의 국제경쟁력 향상을 위한 지상과제로 삼기보다는 진정한 국제경쟁력을 향상하기 위한 내실을 먼저 다녀야 할 것이다. 영어강의는 꼭 필요한 분야에서 적절한 수요만큼만 개설하면 된다. 대학의 ‘진짜실력’은 결국 학문의 수준으로 가늠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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